생을 마감하는 저항의 몸짓 수많은 인사 동참
순국장소 '혈죽' 반일감정 격해지자 日뽑아내
경인일보 발행일 2016-09-20 제18면
원문: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60919010005192
지난달 29일 각 학교에는 조기가 게양됐습니다. 조기는 현충일이나 국가 원수를 역임했거나 국가 또는 사회에 공적을 남긴 사람이 죽었을 때 국가 명의로 거행하는 장례의식인 국장 기간 등에 다는 것으로 깃 면의 너비(세로)만큼 국기를 내려 게양하는 것입니다.
8월 29일은 1910년 일제에 우리나라가 강제로 합병당한 날로 나라를 빼앗겼던 과거를 되새겨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애국심을 북돋고자 조기를 게양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1910년 공식적으로 한일합병됐지만, 이미 1905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을사조약)으로 국가의 기능 대부분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것을 골자로 한 을사늑약에 찬성한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 을사 5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을사늑약에 찬성한 5적을 규탄하고, 조약을 폐기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항일 운동도 전개됐습니다. 특히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던 민종식, 최익현, 임병찬, 신돌석 등의 활동은 잘 알려졌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운이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 국민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자결을 택한 사람들도 많은데 대표적인 인물이 민영환입니다.
민영환은 1878년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민씨 세도에 힘입어 도승지, 예조판서, 형조판서, 독판내무부사 등 관직을 거쳤습니다.
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했던 경험을 토대로 유럽 제도를 모방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해 국가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자 일제 침략을 비판했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의 처벌과 늑약을 무효로 하려는 활동에 앞장서다가 1905년 자결로 일본 침략에 항거했던 것입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병세를 비롯한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등 많은 인사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습니다.
민영환이 순국한 곳은 현재 서울 종로에 있던 자택이었는데, 자결했던 장소에서 대나무가 자라나 당시 화제가 됐다고 합니다. 민영환이 순국(자결)한 다음 해 자결에 쓴 칼과 피 묻은 의복을 보관하던 침실 뒷방 바닥에서 네 줄기의 대나무가 솟아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나무의 출현이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유서의 말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혈죽(血竹)'이라 했는데 여러 신문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자 민영환 선생의 자택에는 혈죽을 확인하고 선생의 넋을 기리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혈죽 사건이 알려지면서 조선인의 반일 감정이 격해지자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이라고 하면서 혈죽이 솟아난 마루를 뜯어내고 그 주변을 파내 강제로 혈죽을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나라의 위기를 목숨으로 지키려 했던 민영환의 묘소는 원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에 있었으나, 1942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구성초등학교 뒤)으로 옮겨지면서 부인과 합장했습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애국충정을 높이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죽은 후에 관직을 올리거나 훈장을 내리는 것)했습니다.
/우장문 수석교사(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