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운명의 근삼리 고인돌
슬픈 운명의 근삼리 고인돌
우장문(대지중학교 수석교사.문학박사)
2015년 02월 23일 (월) 우장문 webmaster@yongin21.co.kr
▲ 옮겨지기 전 근삼리 고인돌
1988년 조사 때에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근삼리에 위치했던 고인돌 3기는 현재 한 기도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는 ‘칠성바위’라고 불리는 7기의 바위(고인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로공사나 개발 등으로 한 두기씩 없어지다가 필자가 조사했던 2003년에는 2기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2기마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현재는 예아리박물관으로 이전됐다.
고인돌은 제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사실 조경석이나 보통 바위에 불과하다. 즉 생명이 없는 것이다. 처음 이곳을 조사한 보고서에는 근삼리에 3기가 있었다고 돼 있지만 원래는 7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칠성바위’라고 불리는 고인돌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홈구멍(성혈)이 새겨진 여러 고인돌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이 별을 중시했고 별자리까지 확인되고 있다.
고인돌을 만들던 시기에 이미 별자리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칠성바위로 알려졌던 근삼리 고인돌도 북두칠성 구조여서 의도적으로 배치했을 것이다. 따라서 근삼리 고인돌은 무덤의 기능을 했다는 통설을 넘어서 천문학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7기의 고인돌이 현재는 원래 위치에 한 기도 남아있지 않다. 근삼리 고인돌은 낮은 능선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 앞과 뒤로 펼쳐진 농경지가 한 눈에 다 보인다.
우리나라 다른 지역 고인돌이 이런 기막힌 곳에 위치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근삼리 고인돌도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던 2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사설박물관 정원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옮겨졌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관리하는 수준이 아직도 후진국 수준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슬픈 모습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근삼리 고인돌이 위치했던 곳에서는 구석기 시대 밀개와 끌개 등의 뗀석기는 물론, 농경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돌보습 등이 채집된 바 있어서 구석기 시대부터 계속 사람들이 생활했던 유적지였다는 사실이다.
뗀석기와 돌보습은 물론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이 함께 있었던 이 일대를 철저히 조사한 다음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 순리가 아니었나 하는 안타까움이 진하게 남는다.
고인돌이 위치했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백암순대로 유명한 백암에서 안성으로 향하는 325번 지방도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장계마을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 마을을 뒤에서 감싸고 있는 작은 산이 있다. 이곳에 고인돌이 위치했다.
예아리박물관으로 옮겨진 두 기의 고인돌은 각각 330×310×110㎝, 300×220×96㎝였고, 이 두 기는 모두 개석식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안성 쪽으로 4㎞를 더 가면 별자리로 추정되는 수많은 홈구멍이 새겨진 것으로 유명한 장평리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다.
용인시민신문 2015.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