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기록

홍주읍성

고인돌인 2021. 2. 6. 21:26

2월 6일 홍성군청에 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군청을 에워싸고 있는 홍주읍성을 잠깐 둘러보았다.(사적 231,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홍성은 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등의 독립운동가로 잘 알여진 고장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행정 중심지를 중심으로 성곽이 위치했었다. 축조 년대를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축성된 것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 읍성 안에 현대식 건물의 군청이 위치하고 있어서 어색한 조합이지만 현 군청은 조만간 옮겨간다고 하니 다행이다. 군청 옆, 성 안에는 홍주성역사관이 위치하고 있어서 둘러봄직하다.

여유를 가지고 홍주읍성을 천천히 둘러보면 행복이 저절로 커질 것 같다. 

 

다음은 홍성군청의 사이트(국가지정문화재 > 홍성의 문화유적 > 문화재 > 명소 > 홍성군 문화관광 (hongseong.go.kr)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홍주성은 백제의 주류성에 비정되고 있으나 초축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고려시대까지도 홍주성 수 개축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홍주읍성의 둘레가 533보2척(1보는 6척), 성내에 샘이 하나 있는데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의 정비와 중앙집권체제의 표현이라 할 지방행정구역의 개편과 왕실의 대행자라는 명분에 힘입어 각 관읍의 위엄도 동시에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관읍의 읍성은 새로운 규모와 격식을 갖춘 성을 새로이 쌓게 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문종 원년(1451)에 새롭게 수축한 홍주읍성의 규모는 성주 4,856척, 높이 11척, 여장이 608, 성내에 우물이 2, 작은 개울 1, 해자는 시설하지 않았으며, 본래보다 물려 쌓았다고 했다.
그 후 수축은 현종대에 한계수에 의하여 중수되고 순조 24년(18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에 의해 수리되었는데 그런 사실을 수성기적비가 전한다. 또 고종 7년(1870)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을 짓고 경의문, 망화문과 관영을 경영하였다. 문종대에 이 성에 문이 4개가 있었으나 남문에는 문루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현재의 조양문은 고종 7년(1870)에 한응필의 개수로부터 비롯되나 1955년 새로이 수축, 단장한 것이다. 또 홍주 아문은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나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는 출입문이다.
홍주읍성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읍터로서 크게 변동이 없었다는 점과 내포평야를 끼고 있어 시대적으로 많은 사연을 갖는다는 점, 조선 초 새로운 축성법에 의한 축성물이 현존한다는 점에서 보존의 가치와 축성법 연구에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산성은 주위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많은 구간이 전면 훼철되고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 중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東軒]), 여하정(余何亭)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읍성의 남문 횽화문
남문 성벽
성벽 위에서 본 홍화문
남문에서 서문 쪽으로 가는 길
서쪽 성벽 안쪽에서
서수문(물이 흐르는 곳)
서쪽 성벽
서쪽 성벽의 성벽에 새겨진 "대흥"이라는 문자, 당시 성벽 건축에 실명제(대흥마을 사람들이 담당)가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성 출신의 성삼문상
홍성 출신의 최영상
관청 관아 입구로 사용되었던 홍주아문
고려 공민왕 때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복원 된 감옥,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가두고 사형시키기도 했다고 하네요.
아휴... 힘들어보여
홍주의 역사를 간단히 보여주는 홍주성역사관
홍주성역사관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