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

동북공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인돌인 2006. 10. 24. 07:49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장문(수원 숙지고등학교 교사) 


머리말


  일본과 역사왜곡 논쟁이 전개되던 2003년, ‘동북공정’이란 낮선 단어가 등장하면서 중국과의 역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이는 한마디로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 정부의 주도아래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겠다는 계획이다. 중국의 계획대로 전개된다면 우리의 역사는 한강 이남의 역사만 남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자존심으로 여겨졌던 고구려 역사를 중국에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온 국민이  분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이후 많은 시민단체나 홈페이지 등을 중심으로 우리역사 되찾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고구려 및 고조선, 발해사를 연구하여 중국의 역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고구려연구재단에 이어 동북아역사연구재단이 출범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동북공정에 대하여 관심이 식어 가고 있어 안타깝다. 반면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로 바꾸려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바꾸려는데 집착하는 것은 이를 기정사실화시킴으로써 고조선이나 발해사를 자연스럽게 중국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때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었던 우리 화성 지역도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삼국시대에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한번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를 잃기 전에 우리 역사를 지켜야 한다.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한 첫 번째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해할 때 효과적으로 대항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기에서는 동북공정이 무엇이고, 어떻게 진행되며, 그들의 의도와 주장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1. 동북공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대형 학술 과제로,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동북 변강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로 옮길 수 있다. 동북공정에는 고구려사에 관련된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동북공정은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중국사회과학원과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이 연합해 추진하는 국책사업으로,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약 200억위안(우리돈으로 약 3조원)을 들여 추진하고 있다. 구체적 연구 과제는 고대 중국 강역이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 민족사 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연구, 중-조(中-朝) 관계사 연구, 한반도 정세 변화 및 그에 따른 중국 동북변강 안정에 대한 영향 연구 등이다. 동북공정의 연구 과제를 보면, 그 프로젝트의 목적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를 한국사(혹은 조선사)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논리들에 대응하기 위하여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기존의 연구 자료를 발굴.정리.분석해 그것을 중국사로 몰고 가려는데 목적이 있다.

 


2. 중국은 왜 동북공정을 시작했는가?


  중국이 우리와 마찰을 빚을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도 동북공정을 시작한 목적은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첫째, 1992년 수교 이후 중국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동북과 백두산 지역을 여행하면서 한국인이 공공연히 ‘고토회복’ 문제를 제기한 것은 ‘주권이 인권에 우선 한다’는 중국의 입장을 크게 자극하였다. 2001년 만주를 한국 땅으로 회복하려고 했던 한국 민간단체의 움직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역사주권의 차원을 넘어 국가주권, 영토주권의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중국의 지방정부와 지방당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예의 주시해왔다. 이러한 우려는 “몇 몇 정객이 정치적 목적으로 여러 가지 잘못된 논리를 공개적으로 펼치면서 혼란을 초래 한다”는 견해로 나타났고, 한국의 잘 조직된 민족주의 운동이 만주를 남한 지향적인 ‘대한민족권’이라는 지역 경제 블럭에 포섭시킬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개된 측면도 있다.

  둘째, 2001년 북한이 고구려 벽화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것이 직접적으로 중국을 크게 자극하면서 발 빠르게 대응하였다. 중국은 기존의 연구 성과에 기반하여 다양한 문물 복원 작업을 벌이는 한편 국제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북한 내 고구려유적이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막았고, 2002년 중국 내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04년 7월 1일 쑤저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WHC) 28차 연차회의에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유적을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북한과 중국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

 

  셋째, 조선족의 한국 취업을 계기로 한국식 문화에 적응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으며, 한류 등의 영향으로 중국 내에서 한국어 배우기의 열풍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수교 이전 조선족 2,3세들이 지속적으로 중국에 동화되는 경향을 반전시키게 되었고 중국으로서는 중국공민으로서의 정체성의 위기라고 판단하였다. 특히 조선족의 국적회복운동이나 재외동포법안은 조선족에게 합법적인 국적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중국은 민감한 반응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재외동포법안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넷째, 중국 내부의 학술연구의 조직적 문제이다. 우선 중국 학술계 내에 나타나고 있는 엘리트의 대통일 천하관념과 국민국가와의 부정합성을 고려하기 위한 측면도 있고, 그동안 북중 우호관계를 고려하여 고대 동북사 연구에서 의도적으로 금기를 풀기 위한 노력도 있었으며, 1980년대 이래 정리된 내부적 정리를 공개화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다섯째, 변강센터와 고구려 연구자들 사이의 프로젝트 확대를 통해 부문적 이익을 경쟁적으로 확보하려는 측면도 있다. 특히 동북지방에 소외되어 있던 변경지역 연구자들이 정치적 목적과 공명심 그리고 자가발전의 측면이 강했다. 동북공정의 의제 확대가 중국사회과학원과 변강센터 및 동북지역 연구기관의 부분 이익을 관철할 수 있었고, 특히 대외적인 문제가 되는 의제는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문 이익에 의해 추진 주체들이 의도적으로 정치화를 강화했던 점이다.


3.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문제의 전개과정


  중국은 1980년대 이전까지는 고구려사는 한국사로 인정했었다. 예를 들면 195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외침략 전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 1978년 14개 대학이 종합적으로 펴낸 세계고대중세기사에 ‘고구려는 중국에서 일어나 국경너머에 있는 한민족이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사임을 인정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중국에서 고구려 귀속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은 손진기(孫進己)이다. 그는 1985년 그의 저서에서 ‘수.당과 고구려 전쟁은 요동의 수복을 군현을 수복하기 위한 전쟁이지 영토확장의 침략 전쟁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인이 한족(漢族)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1990년대 들어 중국의 고구려 귀속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손진기가 중심이 된 심양시동아문화연구소를 필두로,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길림성사회과학원의 조선한국연구소, 동북사범대학 동북민족 강역연구중심 등이 줄줄이 출범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고구려연구에 정부가 나서게 되면서 2002년에 소위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움직임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2003년 7월 15일자 <중앙 일보>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中 학계 ‘역사 빼앗기’ 대규모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동북공정을 소개한 다음이다.

  월간지인『신동아』9월호에서도 중국 광명일보의 「고구려 역사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試論高句麗歷史硏究的幾個問題)」을 번역하여 싣고,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 속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분석하였다.

  동북공정의 문제는 2003년 10월 12일 KBS 일요스페셜이 「한.중 역사전쟁-고구려는 중국사인가」를 방영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다.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도 본격화되었다. 2003년 10월 말에는 역사교육 관련 시민단체인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시민운동본부)’에서 “한-중 역사전쟁, 고구려(사)가 ‘위험’하다”라는 조금은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였다.

  2003년 11월에 들어서 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넓어졌으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고 신문과 방송은 앞을 다투어 이 문제를 다루는 기획기사를 싣거나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동북공정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대응에 나선 것은 물론 학계였다. 2003년 11월 2일 고구려사와 발해사 전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중국의 주장에 대한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이를 알리는 일에 착수하였다. 한국고대사학회를 중심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을 분석하고, 그 주장을 비판하는 학술회의가 잇달아 열렸다.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고구려사 지키기 운동도 일어났다. 반크는 고구려사가 한국의 역사이며, 고구려 유적을 중국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은 E-Mail이나 인터넷으로 세계에 알렸다. 특히 세계문화유산 등록 심사 위원들을 대상으로 메일을 집중적으로 보내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서희장군 프로젝트’도 그 일환이었다. ‘우리역사 바로알기 시민운동’이라는 시민단체에서는 고구려사 지키기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갔으며, 중국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중국 대사관 앞 1인 시위>

 

  민족문제나 역사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들과 사회 인사들은 2003년 12월 28일 ‘(가칭)고구려 역사지키기 범민족 시민연대’를 결성하여 고구려사를 지키기 위한 운동에 들어갔다.  그 결과 2004년에는 활동을 조직적이고 본격화하기 위해 고구려연구재단이 3월 1일 정식으로 출범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2006년 8월 해체되고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흡수되었음)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 출범>


4. 동북공정의 의도는 무엇인가?


  현재 동북공정의 문제는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순한 학문적, 혹은 이론적 논의가 아니다. 그것이 현실 해석으로 드러날 경우 한 쪽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또 다른 한쪽은 새로운 제국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정치적 문제에 학문적이고도 이론적인 방법을 차용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범정부적 대응 역시 늦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단순한 역사적 재해석 작업에 우리 돈 3조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투입할 수 없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는 철저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다. 이것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남북한이 통일된 이후의 조선족 이탈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에서 목표하는 지역은 동북 3성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요녕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대부분의 조선족 자치 구역이 여기에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는 아직 한국의 언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화적으로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적 요소가 짙다. 경제적으로도 지금도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한국 경제의 재채기 한 번에 독감에 걸릴 정도이다. 그들은 지금 현재 한국 경제에 예속되어 있다.

  지금 사정도 이러한데, 통일이 되면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이행될 수 있다. 비록 국경은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갈리고 있지만, 문화나 경제적으로는 한국 쪽에 속하는 상당히 기형적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지금도 중국 정부는 조선족들에게 조국관.민족관.역사관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교육을 시키고 있다. 한국은 고국일 뿐이지만, 태어나서 사는 곳은 중국이므로 그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곳은 중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조선족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자신들의 국경과 영토를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것과 연계시키지 않으려는 정당성을 역사해석에서 확보하려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중국은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만약 조선족이 이탈을 한다면 이는 대만, 티벳 등의 독립운동과 직접 연결이 되어 중국 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자리하고 있다.

둘째, 동북공정의 목표는 남북한이 통일된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영토분쟁에서 역사적인 선점을 해 두려는 것이다. 지금도 중국과 한국의 영토문제는 분쟁의 소지가 있다. 원래 간도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분쟁단계로 남아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고착화 된 것은1909년에 체결된 간도협약을 통해서였다. 그 이전 간도는 중국의 땅도 아니고 조선의 땅도 아니었다.

  간도협약은 잘못된 조약인 을사늑약에 근거해서 당사자인 조선이 빠진 채 일본과 청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2005년까지 을사늑약의 하자를 들어서 이것을 무효화 시키게 되면, 여기에 기반해서 이루어졌던 간도협약 역시 무효가 된다. 이렇게 되면 간도는 중국과 한국 사이의 엄청난 영토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중국은 이러한 영토분쟁의 가능성을 역사 해석을 통해 미리 막으려는 것이다.

  동시에 동북공정에서 목표하는 대로 역사가 해석되면, 한국의 역사적 영토는 대동강 이남 혹은 최악의 경우 한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급변하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중국이 한반도 문제, 특히 북한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실마리를 마련해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으므로 그에 대한 개입 역시 정당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셋째,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중국의 신제국주의를 위한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은 그들의 역사를 한족 중심의 역사로 기술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족 팽창사'로 정리한다.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는 한족 팽창사의 주변사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도 역사 해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불러올 현대적 파장에는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걸려 있다. 동아시아의 중심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규정하는 순간, 중국은 동아시아의 맹주자리를 되찾기 위한 역사적 근거로 이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신제국주의 정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족과 한민족을 포함한 만주족과의 교섭사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프로젝트이다.

 

5.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중국이 ‘고구려=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만들면 발해사는 자연스럽게 중국사가 되고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까지 중국사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고구려사에 관하여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구려는 중국 고양씨의 후예라고 하지만 압록강 일대 예맥족인 건국한 국가이다.

  1990년대 전반기 중국 학계는 고구려의 족원(族源)을 예맥(濊貊)족으로 보고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나라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에 나오는 고이(高夷)를 고구려의 조상으로 설정해 ‘고구려가 신하국가로서 서주(西周)에 조공을 바쳤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고이를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고양씨(高陽氏)의 후예로 합리화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일주서는 신뢰할 만한 사료가 아닌데다가 고양씨는 기원전 3,000년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인물일 뿐이다. 고구려 건국세력은 압록강 중류 일대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예맥계 주민 집단이고, 건국 연대 자체도 많은 차이가 난다.

  둘째,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면서 지방정권을 자처했다고 하지만 이는 전근대 동아시아 외교를 따랐을 뿐이다.

  중국은 고구려의 왕들이 한대(漢代) 이래로 중원(中原) 왕조의 책봉(冊封)을 받는 대신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며 중국의 지방정권을 자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책봉과 조공제도를 중앙정부와 지방관아 사이의 내부적 정치질서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한나라 때 생긴 이 제도는 한나라가 팽창해감에 따라 나라 밖으로 확장돼 나라간에도 조공과 책봉 형태가 나타났다. 조공과 책봉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외교형식이었을 뿐이다.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중국에 조공을 바친 신라, 백제, 일본, 베트남의 역사도 중국사가 된다. 

 

<고구려를 표지에 올린 중국 ‘국가지리’ 1쪽 그림>

 

  셋째, 중국의 논리대로라면 평양시대의 고구려사도 중국사라 할 수 있으나, 이는 중국이 주장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주장에 모순된다.

  중국학자들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따라 중국을 구성하는 55개 민족의 역사,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이뤄진 역사는 모두 중국사의 범주로 간주한다. 이 논리를 따를 경우 북한 영토 내에 있는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는 한국사가 된다. 그러나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논리를 바꾸어가면서 과거 중국의 영토 내에 존재했던 나라의 역사도 중국사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평양이 한나라의 낙랑군 경내에 존재했으므로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까지 중국사란는 논리이다. 이는 현재 영토를 기준으로 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스스로 파기하는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넷째, 고구려와 수.당과의 70년 전쟁은 내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1970년대까지 중국 내에서 사용된 역사책의 기술 내용은 분명히 고구려 대륙정책과 충돌한 국제전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부 중국학자들은 수나라 문제나 양제의 조서(詔書), 당나라 태종의 조서를 근거로 고구려에 대한 수.당의 정벌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중원 통일정권이 변방 소수민족 할거세력을 통제하던 과정으로 결코 침략이 아니며 중국의 고유 영토를 회복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 대 수.당의 70년 전쟁(598~668)은 동북아 일대에서의 독자적 생존권 보전 및 패권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동아시아를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로 재편하려던 수.당 제국의 세계 정책이 정면충돌한 동아시아 국제 전쟁이었다. 이는 1970년대의 중국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있던 내용이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고구려’>

 

  다섯째, 고구려 멸망 후 지도층 유민이 한족에 융화되었다고 하나 대다수 유민들은 발해와 신라에 흡수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고구려 멸망 후 총 69만 7,000호 가운데 중국으로 들어간 유민은 2만 8,000호였다고 하고, 중국 북송(北宋) 때 사마광이 편찬한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監)’에는 3만 8000호로 나와 있다. 이들 중 다수가 왕족이나 귀족들이었는데 중국은 이를 근거로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으로 대거 이주해 한족과 융화됐으므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것이다. 이외에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신라로 흘러들거나 발해 건국에 참여하기도 하고 돌궐 등 유목민에 편입되었으므로 중국의 주장은 맞지 않는다.

  여섯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라고 하나 북진정책을 계승한 명백한 후예이다.

  중국은 고구려와 고려의 건국 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근거로 두 나라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고구려가 한국사인 고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따올 정도로 정신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에 틀림없고, 북진정책을 추진해 개경과 함께 서경(평양)을 양대 수도로 삼을 정도로 실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발해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는데, 멸망 후 고려는 발해의 유민을 고구려의 후예들이라며 받아주었던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맺음말


  현재 중국은 자신들이 지난날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옛 고구려 땅도 자신들이 계승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시대 거란과 서희간의 담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993년(성종12, 통화11) 10월 요의 장군 소손녕이 고려를 쳐들어와 서희와 담판하면서 말하길 ‘너희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 너희 나라가 이를 침식하였다’고 하자,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당신 나라(遼)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역(地境)인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하느냐. … 만약 여진을 쫒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두 사람간의 대화는 현재의 중국과 우리의 영역, 역사논쟁과 유사하다. 즉 중국은 자신들이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옛 고구려 땅도 자신들이 계승하여야 한다는 논리이나, 서희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현재의 영토가 아니라 계승의식이라고 하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은 국명이나 평양 수도로서 입증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고려시대에는『삼국사기』나『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를 편찬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서 ‘삼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시대에 고구려를 우리의 역사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중국의 역사서에는 고구려를 이민족의 역사라고 기술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구려사가 한국사라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중국은 정치적 목적과 자국의 이익을 내세워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중국 국경 내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역사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 고구려사를 비롯하여 고조선사, 발해사를 자의적으로 해석, 한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고 중국의 변방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음모이다.

  중국 주장대로 고구려사가 중국역사라면, 한강 이북 지역은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5,000년의 역사가 아닌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 강역도 한강 이남으로 축소된 역사와 전통이 없는 보잘 것 없는 민족이 전락하고 만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하여 우리의 고구려, 발해, 고조선의 역사를 빼앗으려 하지만 좀더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감시한다면 문제가 조금씩 풀려나갈 것이다. 2003년과 2004년에 이 문제에 대하여 언론매체나 각종 단체에서 법석을 떨었지만 그 이후에는 관심이 현저히 감소한 것이 사실이다. 언론에서 이슈화하지 않는 것에 우리 모두가 너무 무관심하지 않은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의 역사, 영토를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역사 지킴이 홈페이지 반크>




최근 업그레이된 동북공정 내용도 참고하세요.

 http://blog.daum.net/woojangmun/13409967


참고문헌


서길수, 2003. 「‘고구려=중국’ 기정 사실화 노린 3조짜리 프로젝트」, 『역사교육』63

김한종, 2004.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이해와 대처를 둘러싼 문제들」, 『역사교육』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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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회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http://www.chinaborderland.com


2005년 '화성의 뜰'에 게재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