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황석리 고인돌(경향신문 기사)
[한국사 미스터리](10) 제천 황석리 고인돌 (경향신문 2003/7/2)
“선배님 이건 제가 한번 (발굴) 해볼게요”
1962년 3월 하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 발굴현장. ‘쫄다구’ 여성 고고학자인 28살의 이난영씨(당시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선배인 김정기 학예연구관에게 ‘응석’을 부렸다. 그때까지 계획된 12기를 모두 발굴한 상황. 단 하나 남은 게 바로 상석부분이 파괴된 채 흙에 파묻혀있던 고인돌 1기(13호)였다. 이난영씨의 말대로 “너무도 빈약한 고인돌이라 한번 건방지게 욕심을 내본 것”이었다. 선배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만지면 터질세라’ 조심스럽게 흙을 파던 이난영씨의 손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석관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석관을 파헤치자 놀랄 만한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골이 장대한 사람의 뼈였다. 고고학도로서 뜬 첫 삽에서 낚은 완벽한 모양의 인골. 당시 행운을 잡았던 이난영씨의 우스갯소리.
“그 남자의 유골을 지금까지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선배들도 그렇게 놀렸지요”
◇석관·인골 발견으로 복원된 한반도 청동기 시대=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자형 돌관(箱式石棺)과 완전한 형태의 인골(人骨), 그리고 돌검(磨製石劍)의 출토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과거 일제는 선사시대 가운데 구석기 및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고 신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었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를 왜곡했다. 즉 일제는 중국 전국시대 말~한나라 초에 걸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구리(純銅)와 쇠를 들고옴으로써 그 전까지 석기만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한반도에서 석기와 철기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가 바로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시대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다. 그런데 황석리 발굴로 인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존재가 밝혀진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분포된 고인돌의 수는 3만여기(멸실된 것 포함하면 4만여기 추산). 단일지역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유럽의 경우 대서양을 따라 2,500㎞의 범위 내에 약 6만기가 확인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2000년 12월2일, 우리나라의 전북 고창·전남 화순·강화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한반도가 고인돌 천국인 이유는?=그런데 왜 한반도가 이렇게 선사시대 거석숭배사상의 산물로 알려진 ‘고인돌의 천국’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외형으로 볼 때 커다랗고 넓적한 바위를 받침돌 위에 올려놓아 마치 책상을 연상하게 하는 탁자(卓子)모양이 있는가 하면, 탁자라기 보다는 낮은 굄돌(支石) 위에 큰 바위가 놓여있어 바둑판을 연상하게 하는 소위 기반(碁盤)식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커다란 바위만 놓여있는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100t이 넘는 고인돌도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발생에 대해서는 자생설(自生說), 즉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는 설과 유럽의 지석묘가 해양을 따라 전파되어 들어왔다는 남방해양전파설 등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시베리아에서 내려왔다는 ‘북방전파설’. 이는 선사시대의 돌관(石棺)에 커다란 뚜껑돌을 올려놓음으로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자생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집분포하고 있고 오랫동안 축조되었음으로 보아 독자적인 거석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주장이다. 반면 남방해양전파설은 동남아시아의 쌀 농사가 해로를 통해 중국 동북해안을 따라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석묘가 전라·황해·평안도의 서해안을 따라 집중분포하고 있는 데다 남방문화요소가 많은 ‘난생설화분포지역’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방전래설은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들어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사자형 돌관이 지석묘로 확대 발전한 것으로 본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주장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고인돌 축조시기는 BC 12~BC 11세기=그렇지만 한반도에 삶을 꾸려나가고 있던 토착사회에서 고인돌이란 무덤을 채택하는 데는 지역마다 다소 차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외형이 탁자모양인 고인돌은 북쪽에, 바둑판식은 남쪽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결국 토착 청동기인들은 남방과 북방의 문화를 다 받아들여 독자적인 거석문화를 창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고인돌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석묘 발생연대는 청동기 시대의 발생과 불가분 관계를 가진다. 지금까지의 발굴성과로 볼 때 우리나라 청동기인들은 기원전 15~14세기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그게 청동기 문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고인돌 축조시기는 이보다 늦은 기원전 12~11세기 정도 된다.
우리가 고인돌을 통해 밝혀야 할 최우선 과제는 거대한 돌을 상석으로 이용해 무덤을 만든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이다. 이러한 상석을 채석하고 옮기는 데 동원된 인원수와 이에 따른 사회·정치·경제적인 측면, 그리고 무덤에 묻힌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문제, 함께 묻히는 유물을 통한 문화적인 측면 등이 우선 구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고인돌이 당시 공동체 사회에서 무덤으로, 혹은 제단(祭壇)으로 축조되었다고 해도 보통사람의 무덤일 수는 없다. 신분상으로 지배계급 또는 유력자의 전유물임이 분명하며 족장사회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고인돌은 지배계급의 무덤=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이스트섬의 석상, 그리고 영국의 환상석열 등은 어떻게 만들고 세웠을까. 또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심지어는 100t이 넘는 우리의 고인돌 상석은…. 청동기인들이 상석을 운반하는 방법으로는 지렛대, 목도, 굴림대를 이용한 끌기식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무게가 크게 나가지 않는 것은 지렛대를 이용해서 옆으로 옮길 수 있고 아울러 사람이 목도해서 옮기는 방법이 이용되고 있어 그 전통이 뿌리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사람이 옮길 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이상의 무게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끌거나 말이나 소 등 길들인 동물을 이용해서 끌었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석상을 옮기는 방법이 묘사된 조각을 보면 무게가 약 60t에 이르는 거대한 석상(石像)을 운반하는데 나무썰매 위에 석상을 올려놓고 로프로 묶은 다음 90명의 남자들이 로프를 잡고 끌고 있다. 영국 환상석열의 경우 거대한 돌기둥 위에 상석을 올려놓기 위해 돌기둥 높이로 흙을 돋운 다음 40t 무게의 상석을 끌어올리는데, 동원된 사람 수는 장정(壯丁) 180명이었다. 그리고 상석을 올려놓고 난 다음 쌓았던 흙을 다시 제거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약 7t 무게의 돌을 150m 이동하는데 약 73명의 인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실험결과는 1t의 무게를 옮기는데 10명 내외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같이 고인돌의 상석을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진 세력은 지배계층 내지는 유력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 청동기시대가 이미 촌장 또는 추장사회로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