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족, 직장

한라봉, 사과, 10만원 그리고 눈물

고인돌인 2012. 1. 24. 23:43

설 명절에 대학 선배가 은사님을 찾아뵙자고 해서 청주에서 만나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대학 은사님 댁과 가까운 곳에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 때까지 자취를 했던 집의 주인이 살고 계신다.

댁에 계신지 확인 전화를 드리고 마트에 갔다. 무엇을 사다가 드릴까 고민을 하다고 소고기 몇 근을 샀다. 소고기를 선택한 이유는 자취를 했을 때 주인집에서 얻어먹던 기억이 나서이다.

고3부터 자취를 했는데 그 때에는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기도 해서 반찬을 사먹기도 어려웠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어머니가 싸주신 김치가 한 여름에 허옇게 부풀어 올라서 넘치던 것, 반찬이 없어서 왜간장을 직접 전기밥솥에 뿌려서 비벼먹곤 했는데 어릴 때는 먹어보지 못했기에 너무 맛있었던 추억, 가끔은 무국을 끓여서 맛있게 먹던 그런 장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반찬이 없을 때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보시고는 반찬과 국을 가져다가 주시곤 하였다. 그 때는 창피하기도 하면서도 너무 고마웠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 남의 자식에게 반찬을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을 아니다. 그런데 지금 기억으로도 수시로 주셨던 기억이 난다. 특히, 나는 먹어보지도 못했던 소고기국을 가끔 주시기도 하였다. 그 때 얻어먹었던 소고기 생각이 나서 소고기를 조금 산 것이다.

사실 2년 전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혹시 돌아가시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었다. 중간에 몇 번 전화를 드리고 싶었지만 혹시 잘못되셨을까봐 망설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전화를 드리니 두 분과 모두 통화가 되어서 안심을 했다.

현관을 들어서니 두 분이 너무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주머니께서는 나를 꼭 껴안으시면서 반기셨고, 아저씨도 몇 번이고 감탄을 하시면서 반가워하셨다. 아주머니의 건강이 좋아보이셔서 반가웠지만 옆에 계시는 아저씨는 검버섯이 많아지시고 많이 편찮아 보이셨다.

자취 시절의 이야기며, 우리 어머니가 아주머니를 많이 도와주셨다는 말씀, 아저씨가 우리 고향에 아는 분이 누가 있는 데 어떻게 되었느냐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갈 길이 바빠서 나오려고 하였다.

그 때 아저씨가 나를 꼭 잡으시면서 아주머니께 빨리 주라고 말씀을 하신다. 무얼 주시나 했더니 사과 한 상자를 가지고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무슨 말씀이시냐고 극구 사양을 했으나 아주머니께서 들고 나오시면서 꼭 가져가야 한다고 하신다. 거기에다가 검은 봉지에는 한라봉을 담아서 함께 가져가라고 하신다. 와!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너무 간절히 말씀을 하셔서 그냥 나서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들고 나오려고 하는 데 아주머니께서 봉투를 하나 내미신다. 뭐냐고 했더니, 우리 어머니께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사양을 했지만 우리 어머니께 옛날에 신세를 진 것도 있고, 자취할 때 돈을 받지 않았어야 하는데 그 때 돈을 받아서 미안하도고까지 하신다. 너무 황송한 말씀을 하셔서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꼭 좀 어머니께 드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거절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순간 눈물이 울컥 솟았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제발 주지 않으셨으면 한다고 했으나 아주머니도 눈물을 훔치시며 꼭 받으라고 하신다. 할 수 없이 돈도 받아들고 나왔다. 와 어찌 이런 경우도 있는가 하면서...

한파 주의보까지 내린 날씨에 주차장까지 나오셔서 배웅까지 하시는 모습을 뒤로 하면서 주차장을 나설 때 솔직히 좀 멍했다. 이보다 더 소중한 선물과 돈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를 지내러 올라오셔서 서울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 어머니도 울컥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지까지 오셔서 지켜보시던 튼튼하고 마음씨가 너무 좋으셨던 아저씨는 너무 약해지고, 암까지 걸리셨다고 하니 걱정이 더욱 크다.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시는 것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다. 버스와 택시 운전을 하시면서 모범적으로 사셨기에 대통령상까지 타신 어른인데 세월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수원 집으로 올라오는 차에서 세월이 빠른 것에 대한 원망을 하면서도 이렇게 좋은 분들과 한 때이지만 함께 생활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행운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겨울에 잠에서 깨어보면 머리위에 있던 손걸래가 꽁꽁 얼어있었고, 마당에 있던 수돗물에 머리를 감으면 금새 고드름이 생겼으며, 석유곤로의 그을음 냄새가 아직까지 느껴지는 자취집의 4년 동안의 추억보다 짧은 시간에 있었던 오늘의 일은 앞으로 살아갈 나에게 훨씬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주인아저씨 아주머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꼭 건강하세요. 이 나이에 오늘도 많은 사랑을 받기만 했네요.

2012.1.24

'책, 가족, 직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의 고인돌 연구 책 출판  (0) 2013.10.29
박동규교수님께  (0) 2013.01.16
우리반 아이들...  (0) 2011.12.30
주례사  (0) 2011.11.21
영산홍제  (0) 2011.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