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용인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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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철책에 갇혀있는 모현면 왕산리 고인돌 |
경기 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위용을 자랑하는 탁자식 고인돌이 우리 고장에 자리하고 있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498에 위치한 이 고인돌은 경기도기념물 제22호로 모현 지석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을 만나기는 쉽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진입로에서 오른쪽으로 좁은 도로를 따라 100m 정도만 가면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거대한 고인돌 두 기가 5.5m 거리를 두고 자리하는데, 모양이 잘 남아 있는 서쪽 것을 1호, 기울어진 채 남아 있는 나머지를 2호로 구분하기도 한다. 고인돌이 청동기시대에 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것이고, 주변에서 화살촉 1점이 출토되었다고 전하고 있어 청동기시대 무덤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규모가 더 큰 1호 고인돌은 주검이 안치됐던 무덤방이 잘 남아 있는데 길이 260㎝, 너비 100㎝ 정도인 것으로 보아 ‘바로펴묻기(伸展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에 사람을 묻는 방법은 바로펴묻기 이외에도 화장을 하거나 가매장을 했다가 뼈만 수습해서 다시 묻는 ‘두벌묻기(二次葬)’가 있었는데 이 경우에는 무덤방이 크지 않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60㎝, 너비 380㎝, 두께 95㎝로 매우 커서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낼 정도이다. 덮개돌의 무게가 30톤 이상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정도 돌을 자르고 옮기는 데에는 300명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많은 노동력을 동원해서 무덤을 만들었다면 무덤의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보다는 권력이 막강했던 부족장 이상의 힘을 가졌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300명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됐다면 인근에는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점은 경안천을 중심으로 이 일대가 당시에도 사람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인돌의 무덤방 방향은 외국어대 진입로 왼편에 있는 작은 하천인 관청천과 나란하다. 하천 근처에 분포한 대다수의 고인돌은 물 흐름과 나란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죽은 사람의 영생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거대한 고인돌을 품고 있는 왕산리의 지명을 고인돌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왕산리는 돌자개와 왕곡(旺谷) 등의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지명 모두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인돌과 연결시킬 수 있다.
돌자개의 돌이라는 글자에서 거대한 왕산리 고인돌과 같이 큰 돌이 위치한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왕곡은 금거북이가 진흙에 잠긴 모습을 한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금을 왕과 연관시켜 왕자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고인돌 규모가 왕 무덤만큼의 위용을 갖추고 있어서 왕에 버금가는 세력이 이곳에 있었기에 나온 단어가 아닐까 추정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마을 형세가 거북을 닮았다는 유래도 있지만 우리나라 고인돌에는 거북 형상을 한 고인돌이 유난히 많다. 이곳 고인돌을 거북이에 비유한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다.
당당하고 멋진 위용을 간직하고 있는 용인의 자랑 왕산리 고인돌은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고인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고인돌 주변에 튼튼한 철제 구조물이 설치돼 있는데 고인돌과의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고인돌이 감옥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 구조물은 고인돌의 멋진 본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한숨짓게 할 정도로 경관을 해치고 있다.
경기지역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자태를 뽐내는 왕산리 고인돌에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는 고인돌 주변 철제 구조물을 걷어내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낮고 세련된 구조물을 다시 만들어 주는 것이 고인돌을 만든 선조들에 대한 후손들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