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개혁가 정암 조광조의 학덕·충절 기려
우장문 기자
발행일 2016-02-23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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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 /대지중 제공 |
설립당시에 효종이 친히 '심곡' 현판 하사
모범 운영으로 서원철폐령때도 살아남아
사극에서 연산군 때 많은 대신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귀양 보내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죽거나 쫓겨난 사람들은 대개 성리학을 중시했던 사림파인데 사림들이 화를 당했다고 해서 흔히 사화라고 부릅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많은 사림을 제거한 것은 물론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악행으로 신하들에게 쫓겨나게 됐는데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합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젊은 대학자였던 조광조(1482~1519)를 중요 관직에 앉히고 정치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조정은 훈구파(세조가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는 데 공을 세우면서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와 연산군을 내쫓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반정공신들의 세상이었습니다.
바른 유교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조광조는 왕도정치(왕이 유교 덕목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추구해 중종에게도 열심히 공부할 것을 요구했고 유교적 통치 이념을 강화하기 위해 현량과(일종의 추천제)를 실시해 젊은 사림들을 등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향약(향촌 자치규약)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편 조광조는 중종반정에서 공을 세웠던 공신 중 부당하게 상을 받은 사람들을 색출해 토지를 환수하고 관직에서 쫓아냈는데 그 대상자의 대다수가 훈구파였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제거하기 위해 중종에게 여러 모함을 하면서 결국 많은 사림이 죽거나 쫓겨났는데 이를 기묘사화라고 부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갖은 모함에도 중종이 조광조를 신임하자 훈구파들은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씨를 쓰고 벌레가 파먹게 해 중종이 조광조를 죽이게 했다고 합니다. (1519년) 주초(走肖) 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되는데 이 조자는 조광조의 성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초위왕이라 쓰인 잎사귀를 바탕으로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모함을 한 것입니다.
당대의 대학자로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조광조의 묘가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55-1번지에 있습니다. 이 조광조의 묘에서 동쪽으로 300m 정도의 거리에는 조광조의 뜻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한 심곡서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은 1650년(효종 원년)에 정암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려고 세웠는데 설립 당시 효종으로부터 '심곡'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임금이 현판을 하사한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하는데 사액서원에는 책, 노비, 토지 등을 지원해 서원 운영이 원활하도록 국가에서 지원했던 곳입니다.
서원은 16~18세기 수백 곳에 세워져 유교의 보급에도 이바지한 점도 있으나 국가 재정의 부담과 붕당 정치의 온상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피해를 주면서 비판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모범적인 서원 47개소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헐어버린 서원철폐령을 단행했는데 그 47개소에 심곡서원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만큼 심곡서원은 부정이 없이 잘 운영이 됐던 곳입니다.
/우장문 대지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