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침입 맞서 굽히지 않고 항거
청에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절개
경인일보
발행일 2016-11-08 제18면
원문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6110701000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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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달제 선생의 묘 /대지중 제공 |
'삼학사' 일원 척화파 대표적 인물
용인모현 무덤안 요대·주머니만
용인시에는 초등학교 때 불러봤을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의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위인 무덤이 3곳 있습니다.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다 개성 선죽교에서 피살당한 고려 충신 정몽주와 조선 초기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쓰시마 섬을 정벌했던 이종무 장군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 노래 가사에 이름이 직접 쓰이지는 않았지만, 또 1명의 무덤이 용인에 있습니다. 노래 가사에는 '번쩍번쩍 홍길동 의적 임꺽정 대쪽 같은 삼학사 어사 박문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삼학사는 병자호란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 3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병자호란(1636~1637)은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갑자기 세력이 커지면서 조선에 군신 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 요구뿐만 아니라 황금이나 전쟁에 필요한 말 등을 바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오다가 조선에서 청의 요구에 반대하는 기운이 강해지자 이를 빌미로 침략한 사건입니다.
청의 태종이 이끈 대규모 군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포위당해있던 인조가 굴욕적으로 항복함으로써 끝을 맺게 된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가 병자호란입니다. 삼학사는 바로 이 병자호란 때 청과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에 끌려가 사형을 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절개를 기리고자 붙인 명칭입니다.
이 삼학사 중 오달제는 용인에서 출생했고, 무덤도 용인에 있습니다. 오달제 무덤은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지하철역인 죽전역에서 광주로 가는 도로(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45-14)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오달제 선생 묘 및 대낭장비'라고 쓰인 안내판을 따라 도착한 무덤은 일반 무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분이 3개인 무덤 앞의 비석에는 오달제 부인 두 명의 이름만 쓰여 있고 오달제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달제(1609~1637)는 19세에 사마시(소과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 합격하면 하급 관리로 나갈 수도 있고,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도 줌)에 합격했습니다.
이어 26세에는 별시(정규 과거시험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해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병자호란이 발생한 1636년 학식이 풍부하고 성품이 곧은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는 부교리(홍문관의 관직)에 오르게 됩니다.
병자호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왔던 오달제는 남한산성에 포위당한 후에도 청의 침입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됩니다.
불행하게도 조선이 굴복하면서 청나라는 병자호란의 책임을 물어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과 함께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도 끌려가게 됩니다. 이때 오달제의 나이는 불과 29세였습니다.
그래서 현재 오달제 무덤에는 평소에 그가 차고 다니던 요대(허리띠)와 주머니만 묻혀있다고 합니다. 오달제의 의로운 죽음이 알려지면서 조선은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죽은 후에 내린 관직)하였고, 충렬(충성스럽고 절의가 있음)이라는 시호(국왕이 내린 이름)도 내렸습니다.
/우장문 대지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