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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유학 교육·제사 담당한 향교

고인돌인 2017. 1. 5. 14:01


'지역 학문의 전당' 용인엔 2곳 남아

경인일보

발행일 2016-12-27 제18면


양지향교
양지학교 /대지중 제공

조선때 만들어진 용인·양지향교 
주변 신식 교육시설 건립 영향줘
 

우리나라의 곳곳에는 교동이라는 지역 명칭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에는 교동초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가 10곳 넘게 있습니다. 교동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교육기관이었던 향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즉 향교동에서 향자가 빠지고 교동이 된 것입니다. 즉 교동이라는 명칭을 가진 지역은 옛날에 향교가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향교는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공립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지금의 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은 고려 수도였던 개성에 있었고 현재 시·군·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향교를 설치했습니다. 지방의 학생 교육을 담당했던 향교는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조선 시대에는 대학에 해당하는 교육 기관인 성균관이 서울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의 성균관대는 조선 시대의 성균관이라는 명칭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중등교육기관인 향교는 공부만 중시하는 현재 학교와는 달리 공자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향교에는 중심 건물로 대성전과 명륜당을 뒀습니다. 

교실에 해당하는 건물이 명륜당이고, 유학의 시조인 공자나 맹자 등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던 건물이 대성전입니다. 그리고 명륜당 앞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는데 이는 현재 기숙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향교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성균관과 향교에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성균관과 향교에 은행나무가 있는 이유는 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교육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은행 열매처럼 학문을 수확하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많은 학교에는 교목(학교를 상징하는 나무)을 은행나무로 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향교는 조선 시대의 각 부·목·군·현마다 하나씩 설치해 300곳이 넘는 곳에 있었습니다. 용인에도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용인향교와 양지향교가 있습니다. 원래 향교는 한 지역(군이나 현)에 하나씩만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용인 지역에 향교가 2곳인 이유는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이 개편돼 양지 군이 없어지면서 양지 군의 일부가 용인 군으로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2개 향교 가운데 용인향교가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용인시 기흥구 용인향교로 12-6에 있는 용인향교는 조선 초(1400년)에 건립돼 용인 지역의 인재 양성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현재 용인향교에는 대성전, 명륜당, 삼문(대성전 정문) 등이 있으나 큰 은행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용인향교는 원래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있었는데 1894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기 때문입니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향교로13번길 20에 위치한 양지향교는 1523년 양지 군의 지방교육기관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양지 군이 용인 군에 합쳐지면서 지금은 용인시 소재의 향교가 된 것입니다.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내삼문 등이 있고 150년이 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향교를 지키고 있습니다.

개항 이후 신식교육이 들어오면서 많은 향교가 교육적 기능을 상실했지만, 양지향교는 지속적으로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향교 주변에 위치한 양지초와 용동중 설립에 영향을 줬습니다.

 

현재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서 주변의 향교를 찾아 조상들의 공부했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장문 대지중 수석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