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독도문제

고인돌인 2006. 9. 29. 13:10
 

우리 나라의 자존심 독도

우장문(수원 숙지고등학교 교사)

 

  애국충절의 고장인 화성에서는 제암리 사건에 분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의 압제에 다각도로 독립운동이 전개된 화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처참한 제암리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하여 3,1절 행사 때마다 전 시민이 하나 되어 그날을 되새기는 행사를 하고 있으며, 일제에 항거한 흔적을 밝혀내고자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독도를 다케시마현에서 일본 영토로 공식 편입시키는 조례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는 한․일간에 잠복되어 있던 독도 문제를 다시 한번 표면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에 유난히 피해를 많이 당했고, 항일 투쟁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화성지역에서는 더욱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처사에 대하여 분개하면서도 실상은 독도에 대하여 소상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듯이 독도를 바르게 알아야 독도를 지킬 수 도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해 놓고는 자신들의 해양 영역 안으로 포함시켜 놓았다. 일본의 '독도탈환작전'은 치밀하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선 그들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할 뿐 아니라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으로 표기한 지도를 국제적으로 배포, 선전하고 있으며, '시마네현 다케시마'라는 이름의 주소지로 하여 호적을 이전하였다.(그림 3)

  국제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로 주장할만한 근거들을 하나씩 마련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다케시마를 점령하고 있으니 다케시마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외치고 있다.

  이에 맞서서 우리가 독도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독도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먹구구식으로 우리 땅이라는 구호만 외치는 것은 억지로밖에 들릴 수 없을 것이다. 독도의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독도를 지키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독도에 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우리의 섬 독도는?


  독도는 동도(東島).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6개 바위섬으로 이뤄진 화산섬이다. 울릉도 동남쪽으로 약 89㎞ 떨어진 해상에 있으며, 일본에서 제일 가까운 시마네현 오키섬과는 160㎞의 거리다. 울릉도가 오키섬보다 약 70㎞ 가까운 셈이다.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

  독도의 주소는 2000년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로 변경됐다. '799-805'라는 우편번호도 받았다. 독도의 면적은 18만902㎡(5만4819평)로 서울 여의도 광장의 절반 정도 크기다.

  독도는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1982년 11월 '독도 해조류 번식지'로 지정됐다. 독도 입도 관리가 1999년 5월 해양경찰청에서 문화재청으로 이관됐고 1999년 6월에 '독도 관리 지침'이 제정됐다. 같은 해 12월에는 '독도 해조류 번식지'에서 '독도천연보호구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독도 일원은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등 해조(海鳥)류 번식지로서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암석. 지형. 지질. 광물 등의 지질학적 가치가 높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독도의 공시지가는 2억7287만여원. 접안시설과 해안경비대 숙소.헬기장이 있는 동도의 산 27.28.35번지가 ㎡당 9만5000원(평당 31만4051원)으로 가장 비싸다. 서도 산 20번지 해안 산림지대 9만5008㎡ (2만8740평)의 공시지가는 ㎡당 239원으로 가장 싸다. 현재 독도의 소유자는 해양수산부로 돼 있다.

  독도는 국제법적으로 영유권의 기준이 되는 자연섬이 아닌 암초로 규정돼 있다. 자연섬의 기준은 나무가 자라고 식수가 있으며, 경제활동을 하는 2명 이상의 거주민이 있어야 한다. 독도를 섬으로 만들기 위해 1981년 10월 최종덕(87년 9월 사망)옹이 최초로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겼고,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에서는 89년부터 독도에 나무를 심어 서도에 두 곳의 식목지를 조성했다. 독도로 본적을 이전한 사람은 10일 현재 259가구 946명. 그러나 현재 경비대원을 제외하곤 거주민이 없는 상태다.


2. 역사를 통해 보는 우리 땅 독도1)


  독도는 삼국시대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래로 우리의 땅이었고, 현재도 명백한 우리 땅이다.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독도에 관한 정책 및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땅 독도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1) 삼국시대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현재 기록상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하슬라주(溟州) 군주(軍主) 이사부(異斯夫)의 우산국(于山國) 정벌부터라 추정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 및 주변해역을 무대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신라가 우산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현재 울릉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반도 본토 문화의 보다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은 본토의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울릉도․독도 등 해양도서민들과 본토민들의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안 일대의 도서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2) 고려시대 여진과 왜구의 침범


  울릉도․독도지역은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우리의 강역내에 존재하였다.

  고려 태조 13년(930),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자 우산국은 왕건에게 래조(來朝)와 함께 방물(方物)을 바쳤다. 고려가 새로운 통일왕조로 등장한 후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우산국(于山國) 혹은 우릉성(羽陵城)으로 불리면서, 고려의 동해안 외곽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며 본토와 지속적인 문물교류를 통해 번성해 갔다.

  의종 11년(1157)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김유립(金柔立)의 우릉성 조사보고에서 당시에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석불(石佛)․철종(鐵鍾)․석탑(石塔)' 등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11세기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이 지역이 황폐화하기 이전까지는 본토의 수준 높은 불교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우산국은 대체로 고려전기 현종 이후 급격히 황폐화 되었으며, 그 결정적인 요인은 여진족의 침입이었다.

  우산국이 여진족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것은 현종 9년경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즉시 우산국에 농기구를 보냈으며, 다음 해(현종 10년, 1019)에는 여진족 침입 당시 본토로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산국의 피폐상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던 듯 하며, 이에 현종 13년(1022)에는 본토에 피난했던 우산국 사람들을 예주(禮州-지금의 영해지역)에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 후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계속된 국내외 정세의 불안과 1231년(고종 18)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공으로 인해 옛 우산국 혹은 우릉성지역에 대한 개발은 보류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기간에 걸친 몽고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있던 고종 30년(1243), 울릉도에 동해안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주가 실시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선 대몽항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육지의 주민들을 산성(山城) 혹은 해도(海島)로 이주시킨, 중앙정부의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불력(佛力)을 빌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 중 피란 수도 강화경(江華京)에서 혼신의 열정으로 판각되었던 강화경판고려대장경(江華京板高麗大藏經, 일명 八萬大藏經)의 재목(材木)을 구하기 위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몽고와의 강화 이후 원의 대목(大木)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려정부는 울릉도에서 벌목을 행하였다. 대규모로 이루어진 벌목으로 현지민들의 고초가 심했으며,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본토로 도망했으리라 생각된다.

  원간섭기 동안에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지배는 계속되었다. {고려사}에는 충목왕 2년(1326) "동계의 우릉도인이 래조(來朝)하였다(東界芋陵島人來朝)"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동계(東界)란 오늘날 강원도와 함경남도 일원으로 고려의 지방행정구역이었으며, 우릉도(芋陵島)는 울릉도의 다른 명칭이었다. 독도가 고래로 울릉도의 속도(屬島)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이 지역은 고려의 통치지역 중 하나였으며, 지속적인 본토와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후에도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은 어려웠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되어 고려말까지 계속된 왜구의 창궐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사》에는 우왕 5년(1379) 7월 "왜가 무릉도에 보름동안 머물다가 물러갔다(倭入武陵島 留半月而去)"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문헌상 우왕대의 기록만 보이지만 왜구의 이 지역에 대한 침탈은 충정왕대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며, 주민의 거주를 어렵게 하였을 것이다.

  결국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된 후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개발은 신왕조의 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려말 왜구의 침구와 이 지역의 피폐는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주민의 이주보다는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을 택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3) 조선의 수토정책


  조선시대 울릉도․독도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여 섬을 비우는 수토정책(搜討政策)으로, 태종부터 고종까지 지속되었다. 한국사에서 주민의 이주정책은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수토정책 역시 이러한 이주정책의 하나였다.

  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의 위협이 사라졌고, 고려후기 이래 집중된 왜구의 침구도 점차 수그러들고 있었으므로 동해안 외곽 방어선으로서의 울릉도의 기능은 훨씬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태종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방제도의 정비와, 국초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된 동북․서북면의 개척과 사민정책 등은 당시 국력의 집중을 요하는 것으로, 울릉도 및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경략과 재건은 보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국초부터 추진된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정비방향은 모든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는 동시에 고을의 통․폐합을 통하여 그 수를 줄여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굳이 울릉도에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전쟁수행, 지역개발 등에 주민 이주정책을 적절히 사용해 왔던 역사적 경험은, 조선 태종때에 많은 토론을 거쳐 울릉도에 대해 '주민의 철수와 정기적인 수토'를 택하게 했던 것이다.

  한편 수토정책은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과 함께 정기적인 순찰을 병행하는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부담은 계속 남는 것이었다. 때문에 섬을 비우기보다는 관부를 설치하고 주민을 이주․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논란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중앙정부의 거주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본토의 民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내왕하며 어로․채취작업을 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는 울릉도 등지에 대한 정기적인 순찰을 통해, 토산물 등의 현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거주민들이 발견되는 즉시 본토로 송환시켰다.

  수토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한 태종 때부터 대마도주의 울릉도 거주 청원이 있었으나, "이국인이 국경을 넘나들 경우 분쟁의 소지가 발생한다" 하여 기각되었다.

  이러한 수토정책이 철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이었으며, 1883년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면서 울릉도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주민이주가 시작되었다.


  4) 조선 후기 독도를 지킨 안용복의 활약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독도 등지에서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다.

  이에 1613년(광해 6) 조선조정에서는 대마도주에게 공문을 보내 일본인의 울릉도 등지에 대한 왕래를 금하게 하였다.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끼슈(伯耆州) 요내꼬(米子)의 상인 오오따니(大谷), 무라까와(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독도에 대한 침구는 계속되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과 일본의 어부들은 종종 충돌하게 되었으며, 급기야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오따니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면서, 1699년(숙종 25)까지 약 6년간에 걸쳐 두 나라간 울릉도․독도 영유권에 대해 외교문서가 오가는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조정의 강력한 대응으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과정과 결과가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17세기 말엽에 양국 최고 통치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며 두 섬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는 것과,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은 당시 일반 백성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조정에서 일본에 보내어진 서계에는 한결같이 '울릉도와 독도가 지금은 비워져 있지만 옛부터 내려온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고, 1차 충돌 후 납치되어 간 안용복의 당당한 항의에, 에도 막부에서는 면밀한 검토 끝에 '울릉도(竹島)와 우산도(于山島-松島 :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써 주었다.

  2차 충돌시 일본인들은"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竹島, 독도를 松島라 칭하였다)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에, 안용복은"송도는 자산도(子山島: 당시 조선에서는 독도를 于山島로 칭하였는데 '于'자가 '子'․'干'․'千'자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는 대답에서 당시 독도가 우리의 땅이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일본인들은 안용복 사건이 울릉도에 국한된 것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점을 볼 때,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이미 17세기 말엽에 독도의 영유권논쟁이 종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이 사건이 종결된 이후 그 결과가 양국간 영토의식과 그 경계 획정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울릉도․독도 등지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였다. 지금까지의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2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인 순찰을 행하게 되었다. 사정에 따라 격년을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평균 5년내에 1회씩의 순찰은 한말 울릉군수가 파견될 때까지 꾸준히 지속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의 결과로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다. 1696년 호끼주(伯耆州) 태수가 작성한 {이소다께시마각서(磯竹島覺書)}와 1785년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81년 기따자와(北澤正誠)가 작성한 {竹島考證}․{竹島版圖所屬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일본측 자료들이다.


  5) 광복과 독도의 회복


  1945년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반도 부속도서로서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2차대전이 종전된 후 연합국은 1945년 9월 27일 미 5함대 사령관의 '각서 80호'로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여 통지하였는데 이를 '맥아더 라인'이라 한다. 이 선에 따르면 독도는 한국령에 귀속되어 있다.

  1946년 1월 29일 일본정부에 하달된 연합군 최고사령관 훈령 677호(SCAPIN No 677) 3항에는 추축국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지역을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竹島)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46년 6월 22일의 훈령 1033호에는 "일본의 선박과 선원은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해서는 안되며, 이 섬에 대한 여하한 접근도 금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은 전 세계가 인정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인한 우리 정부의 행정 및 군사력이 독도에 미칠 수 없는 공백을 틈타 독도에 다시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52년 1월 18일 우리 정부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발포하여 독도가 우리의 영토이며, 그 주변 12해리가 우리의 영해임을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동월 28일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박 구상서를 우리 정부에 보내옴으로써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은 다시 불붙게 되었다.


  6) 일본의 점령을 막아낸 독도의용 수비대


  한국전쟁 중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때 일본은 다시 독도에 불법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에서 56년에 걸쳐 독도에서 일본의 불법 점령을 막아낸 것은 울릉도 출신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었다.

  의용수비대원들은 1953년 4월 독도에 입도한 후, 1956년 12월 25일 경북경찰청 울릉경찰서에 독도수비 임무와 장비 일체를 인계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갈 때까지, 자금과 무기를 자체적으로 조달하면서, 약 3년 8개월간 수차에 걸쳐 계속된 일본의 영토침범을 격퇴하였다. 숭고한 애국심으로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견디면서 독도를 사수했던 의용수비대의 활약이 없었다면, 한국전쟁 중에 독도는 다시 일본에 점령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3.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닌 이유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닌 이유는 우리 땅이기 때문이라는 명백한 사실이 있다. 이 외에 일본이 독도가 일본 땅이고 조선 땅이 아니라는 여러 주장도 허구임을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일본에서 만든 많은 지도 자료나 역사 자료를 통해서 명백히 밝혀지고 있으나 다음의 세 가지만 살펴보겠다.


  1) 일본이 울릉도라고 주장하는 삼봉도는 독도


  일본은 현재 우리의 옛 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三峯島)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가 삼봉도로 불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많다.

  우선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삼봉도의 형상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한다"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의 {전보신문(電報新聞)} 1906년 5월 27일자 기사에는 러일해전의 전장(戰場)으로 독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지형을 설명하면서 동도와 서도 그리고 관음도(觀音島)라 하여 세 개의 섬을 열거하였다. 또한 이 신문에 실린 독도의 전경 사진에는 세개의 섬 즉, '삼봉도'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제3국의 자료를 살펴보자. 1849년 3월 독도를 목격한 미국 포경선 '윌리암 톰슨'호는 그 항해일지에 "세 개의 바위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즉, 독도의 모습을 '삼봉도'로 파악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도가 삼봉도였음은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제3국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의 진실성은 오늘날 해상에서 독도를 관망해 보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독도를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독도가 '삼봉'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진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한국기록에 나타나는 삼봉도는 울릉도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주장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우리의 기록이 구체적이고 정확했다는 것도 함께 알 수 있다.


  2) 단지 회람에 불과한 시네마현 고시40호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러시아함대를 감시하기 위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일본 본토와 연결된 전선망을 설치하는 동시에 망루를 세웠다.

  일본군부는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일본 정부에서는 1905년 1월 28일 각의결정 후, 같은 해 2월 22일 '시마네현(島根縣) 고시 40호'를 통해 독도를 일방적으로 일본영토에 편입시켰다.

  위 고시 40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끼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끼도사(隱崎島司)의 소관으로 정한다."

  이 불법 편입사실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통감정치가 확립된 후인 1906년 음력 3월 5일에야 대한제국에 알려졌다.

  이 고시는 현재 일본에 의해 독도의 편입이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입각하여,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영토편입이라는 중요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즉, "독도는 1905년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었으므로 일본이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할 경우 영토획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국제법상 요건을 충족시켜 시마네현(도근현)에 편입시킨 합법적인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독도가 강제편입되어 있었던 시마네현에는 지금도 "다케시마(竹島)를 회복하자"는 내용의 입간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고시는 법적효력이 전혀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고시로 존재하지 않은 회람(回覽)에 불과한 것이었다.

  첫째, 독도는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 아니었다. 독도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 41호로 울릉도에 군수를 파견할 때, 이미 그 관할 구역(石島: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돌섬'의 한자식 표기)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 군부가 독도에 대한 불법 영토편입을 추진하면서 표면에 내세운 일본 어업가 中井養三郞의 '리앙꼬島領土編入 貸下願'은 원래 중정양삼랑이 독도근해의 독점어업권을 대한제국으로부터 빌리기 위해서 일본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데,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과 해군성 수로부장의 공작에 의해서 대하원(貸下願)에 '리앙꼬島 영토편입'이 추가되어, 대한제국정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청원된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본 내무성은 러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독도를 편입시키는 것은, '한국정부의 저항'으로 쉽지 않을 것이며, 열강에게 '일본이 한국병탄의 야심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고 영토편입을 반대하였다.

  즉, 당시 영토편입 당사자인 일본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독도의 영토편입은 국제법상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둘째, 선점(先占)의 경우, 무주지역을 자국의 영역에 편입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공표하게 되어있는데, 일본은 그러한 절차를 편법으로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편입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일본은 다른 도서(島嶼)의 경우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때 각의(閣議)를 거쳐 해당 관공서와 신문에 고시해온 관행(慣行)과 달리 유독 독도의 경우 소위 [시마네현고시 40호]는 당시 일본의 104개 신문 중 어디에도 고시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관보(官報)에 조차도 1905년 6월 5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시에 명시된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현재 이 고시의 원본은 유일하게 시마네현청에 단 1장 보관되어 있는데, 이 문건은 1905년 2월 22일 당시 시마네현에서 발간됐던 [시마네현령(島根縣令)]이나 [시마네현훈령(島根縣訓令)]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다. 더구나 이 문건에는 회람(回覽)이라는 주인(朱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이로써 일본이 내세우는 [시마네현고시 40호]는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 '회람(回覽)'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일본의 합법성 주장과는 달리 당시 독도 영토편입이라는 것은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했던 명백한 침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는 러일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과정에서 불법 침탈되었으며, 독도의 침탈은 한반도 침탈의 시작이었다. 일본의 억지와는 반대로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오히려 역사의 진실을 밝혀 주는 자료가 될 뿐이다.


  3)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히고 있는 일제의 수로지


  일본해군이 발행한 {수로지(水路誌)}는 정부의 공식 간행물로 공신력이 높다. 그런데, 광복이전 일본의 수로지에는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한국의 영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도박물관에는 1945년 8월 광복이전의 일본 수로지로 ①{환영수로지( 瀛水路誌)}(1883년판․1886년판), ②{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1894년판․1899년판․1907년판), ③{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1911년판․1920년판), ④{조선연안수로지(朝鮮沿岸水路誌}(1933년판), ⑤{조선연안간이수로지(朝鮮沿岸簡易水路誌)}(1945년판)가 전시되어 있다.

  위 수로지 ①에는 독도관련 내용이 '[リヤンコ-ルト]列岩'이라는 제목으로 [조선국일반정세(朝鮮國一般政勢)]의 항목에 들어있다. ②의 {조선수로지} 1894년판(255~256쪽)과, 1899년판(263쪽)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1905년 [시마네현고시 40호]이후 발간된 {조선수로지} 제2개판에는 명칭이 '竹島(Liancourt rock)'로 바뀌어 있는데, […한국인은 이를 獨島라 쓰고, 일본어부는 리양꼬島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이외 위 수로지들은 광복직전인 1945년 6월에 발간된 ⑤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내용으로 일관되게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원래 조선의 영토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일본 수로지의 내용은 광복이후 발간된 1952년 판 {조선남동안수로지(朝鮮南東岸水路誌)}에서부터 변화된다.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게 된 일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도를 울릉도와는 별개의 섬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일본 수로지의 내용을 통해서 광복직전까지 일본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알고 있었으며, 현재 일본의 독도영유권의 주장이 교활한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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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汝政, 「地文航海學」, (부산: 해양대학 해사도서 출판부), 1987.

이한기, [한국의 영토: 영토획득에 관한 국제법적 연구],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69.

3) 독도를 일본해로 표기한 일본 중학교 사회과 지도

 

2005. 6. 우장문(화성의 뜰에 기고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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