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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리면서...

고인돌인 2006. 10. 15. 21:49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리던 날... 


지난 일요일에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리고 오면서 느꼈던 것을 몇 자 써 보았습니다.

오늘 막둥이 딸과 같이 고향으로 향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는 길이지만 오늘은 좀 다른 날이다. 고향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로 산골 중의 산골 마을이다.
오늘은 몸이 많이 편찮으신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 드리기 위하여 이발기를 들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할아버지가 무섭다고 가기 싫어하는 늦둥이 딸을 잘 구슬러서 옆자리에 태우고 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다.
아들 온다는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온다고 음식을 준비하라면서 어머니를 못살게 굴 아버지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20분전의 거리에 있는 미원에 가서야 전화를 드렸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어머니는 밥을 먹이려고 찌개를 끓이고 계셨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너무 자식들에게 헌신적이고 사랑이 넘치시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이시다. 걸어서 10m 도 채 가시지 못하는 아버지는 이발소에 가실 힘이 없으시다. 몇 달 전에 내가 이발소엘 모시고 갔는데 너무 힘들어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이발소에를 모시고 가고 싶었지만 힘이 없으셔서 도저히 못가신다고 하신다. 차로 가면 5분이면 가는 4킬로미터의 거리인데 그런 힘도 없으시다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2주전에 집에 갔을 때 머리를 깎아드리려고 했으나 실수로 이발도구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깎아드리지를 못했었다. 나는 사실 한 번도 머리를 깎아본 적이 없다. 집사람이 머리 단속이 유달리 심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의 머리를 다듬어 주기 위하여 기계를 구입한 것이다. 집사람이 아들 깎는 구경만 했는데 내가 깎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전화로 머리를 그냥 모두 밀어버렸으면 한다는 말에 용기를 가지고 가는 것이다.
내 기억에 시골에서 농사로 한평생을 보냈지만 수염이 긴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단정한 분이었다. 이런 분이 몇 달 동안 머리를 깎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에 내 가슴은 요즈음 너무 아팠었다. 물론 앞머리는 거의 없고 주변머리만 조금 남아 있지만 긴 모습이 낯설어서 그런지 더 초췌해 보였다.
아침에 시험감독이 있다고 출근하는 아내에게 시골에 가서 아버지의 머리를 깎아드리고 오겠노라고 하면서 부모님의 기쁨조인 막둥이를 데리고 간다고 했더니 집사람도 반기는 눈치였다.
처음 만져보는 미장원용 이발기를 가지고 아버지의 머리를 깎는 것이 어색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평소에 하지 않던 유머를 동원하여 가면서 머리를 깎았다. 혹시 날에 찔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깎다 보니 머리가 짧게 깎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어릴 적 아버지가 내 머리를 깎으실 때 내가 따가워서 몸을 움직이면 나를 혼내던 기억이 나서 잠시 입가에 미소가 돌기도 했다. 
머리를 깎는 잠시 동안이지만 앉아 계신 것 자체를 너무 힘들어하 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 가슴을 조여왔다. 이럭저럭 혹시 아버지가 아프지 않을까 하여 조심조심 하면서 깎았는데 다행히 보기 싫지는 않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나니 훨씬 생기가 있어 보이셔서 다행이었다. 또 내 자신이 아버지의  머리를 깎았다는 자체가 너무 대견스러웠다.
점심을 2시 쯤 먹고 좀 쉬다가 침대에 누워서 조심해서 가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수원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중학교 졸업 때까지 나의 머리를 깎아 주셨고, 4남 3녀 모두의 머리를 깎아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누나들에게 소위 말하는 봉순 언니 머리를 해주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너무나 가난해서 어머니는 말 그대로 우리를 낳고도 미역국도 먹지 못하셨고, 아버지는 심부름으로 콩 한 가마니를 10리나 되는 거리를 지게로 지어다 주셨는데 홍시감 1개 밖에 주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었다.
오직 몸둥이 하나로 부서져라 일했고, 소작농으로 시작하여 7남매를 모두 잘 키워주신 아버지이시다.
일제시대 일본 광산에 가셔서 고생을 하셨고, 한국전쟁 때에는 마을에 북한군이 진을 치고 있어서 벽장에 숨어서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이시다. 또 첩의 자식이라고 제대로 대접도 못 받으시면서 힘들게 자식들을 키우신 아버지이시다. 결혼 생활을 숫가락 하나도 없이 생활을 시작하신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는 비록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 근처에도 가보시지 못하여 한글을 깨치지도 못하셨지만 남에게 싫은 소리 않으시고, 남에게 폐되는 일을 절대 못하시게 교육을 하셨고, 이를 몸소 실천한 분이다.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다. 모두 행사가 있을 때만 찍은 사진이 전부이다. 초,중,고의 졸업에는 못오시고, 대학 졸업사진과 형제들의 결혼식 사진에서밖에 함께 찍은 사진이 없는 아버지, 18년 전 내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의 아버지 모습이 젊기만 한데, 85세의 아버지는 너무 작고 왜소해 보이기만 한다.
이것저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운전을 하기가 어려웠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화장지로 눈물을 닦으려니 6살 늦둥이가 왜 우느냐고 한다. 할아버지가 너무 늙고 편찮으셔서 속이 상해서 그렇다고 하니 어린 딸도 숙연해지는 것 같았다.
박사학위를 했다고 했을 때 박사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모르셨지만 너무 기뻐하셨던 아버지
수원시 문화상을 수상했다고 했을 때 기뻐하시던 아버지
내가 쓴 책을 내복 상자에 보관하시면서 남들에게 자랑하시기에 바쁘셨던 아버지
매일 전화 드릴 때마다 당신 몸은 아프지 않다고 하시면서, 우리 걱정만 하시는 아버지
아버지 앞에서는 한번도 못해본 말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2006. 10. 16. 막내아들 우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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