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족, 직장

고인돌과 더불어 생활했기 때문에 더욱 행복한 교직 생활

고인돌인 2007. 3. 1. 23:02
 

고인돌과 더불어 생활했기 때문에 더욱 행복한 교직 생활


수원 숙지고등학교 교사 우장문


교사라는 직업에 만족하는가?

  교직 생활 23년을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교직을 선택한 내 자신이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깊어진다.

  올 1월 중순에는 초임지에서 담임을 했던 아이들(이제 아이라고도 하기 힘든 마흔 살이 되었다.) 일곱 명이 찾아와서 1박을 하고 갔다. 수원 화성도 함께 답사를 하면서 20년 전의 일들을 이야기 하는 동안의 즐거움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 그 자체였다. 언제나 생각나는 제자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고, 안부를 물어오는 제자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2006년 9월에는 수원의 한 작은 식당에서 30~40대의 제자 20여명과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했는데 제자들과 만나서 좋았고, 제자들에게 줄 책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복했다.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일반 가족들을 인솔해서 고적답사도 다녀 보았고, 대학생이나 일반인을 상대로 해서 강의도 해 보았으며, 동북공정을 주제로 선생님들께 특강도 해 보았다. 답사기행이나 특강 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을 계속 할 수 있는 교직에 있기 때문에 얻을 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에서의 행복은 교사로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교사라는 직업에 항상 자부심을 느낀다.


학창시절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 청주에서 충북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고향 집에 가니 여동생이(7남매 중 막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여동생이 진학하지 않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 때문에 동생이 희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커져갔다. 다행히 결혼 후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서 미안한 마음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항상 부담이 되었다. 이 동생과 2005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손을 잡고 함께 눈물을 흘렸었다.

  학창시절에 보았던 부모님의 고생은 아무리 이야기 하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다. 아버지의 말씀 중에 콩 한가마니를 지게로 10리나 옮겨준 대가가 홍시감 하나였다는 말씀이나, 어머니가 출산 후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미역과 쌀을 주신 이웃집 할머니가 너무너무 고마웠다는 말씀을 몇 번이나 들었다. 지독한 가난으로 7남매 중 나만 대학을 졸업했고 나머지 육남매는 한 명도 고등학교조차 입학하지 못했다.

  대학시절에는 결핵성늑막염이 걸린 적이 있었다. 이때 어머니가 간호를 하시면서 눈물짓던 모습을 보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했는데, 가끔 자취집을 와보시고는 안타까워하셨다. 자취를 하느라 몸이 망가져 병에 걸렸다며 당신을 탓하시는 눈물이었다. 그 이후 나는 한 끼도 굶지 않았다. 건강을 잃어서 어머니 눈에서 다시는 눈물이 나게 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교직 생활에 귀감이 된 선생님을 꼽는다면?

  나는 억세게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너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특히 교직 생활에서 귀감이 되었던 두 분이 있다. 그 중 한 분은 현재 남양주의 진건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는 이강문 선생님이다. 초임지인 포천 영북종합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인품이 뛰어나신 선생님과 함께 한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당시 이강문 선생님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앞장서서 하시면서도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는 봉사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나는 당시 부원으로 있으면서 항상 마음이 푸근했고 교사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항상 당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생활은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존경받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이강문 선생님의 생활을 귀감으로 해서 살아보려고 하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또 한 분은 수원여자고등학교에서 3학년 부장으로 모셨고, 숙지고등학교에서는 교감으로 모시기도 했던 백두현 선생님이다. 지금 화성시의 병점고등학교에 교장으로 계시는 백두현 선생님은 말 그대로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 분이었다.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셨으며, 방학 중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해서 학생들을 격려했던 책임감이 투철한 분이셨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분이었다. 지금도 당시 3학년 담임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모든 선생님들이  참석 한다. 10년 넘게 모임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백두현 선생님의 인간적인 매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생활상은 교직 생활을 하는 나에게 큰 이정표 역할을 했다.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을 꼽는다면?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취미삼아 대학 때부터 전공했던 고인돌에 관하여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근면한 생활 습관을 길러주신 아버지를 꼽을 수 있다. 농사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매우 엄하셨다. 아침에 아버지의 기침소리면 나는 자동으로 일어나야 했는데 이후 사회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새벽 5시 정도면 일어나는 습관이 굳어졌기 때문에 아침에 한 두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하여 지금까지의 많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가장 즐거워하셨던 분이 아버지셨는데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뻐해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립기만 하다.

  아버지 못지않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은 대학교 때 은사였던 이융조 교수님 내외이다.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일을 했다. 발굴도 하고 유물 정리도 하면 장학금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되면서 나는 결핵성늑막염으로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6개월 간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을 해야 했는데 약값이 너무 비쌌다. 부모님께 보험도 적용되지 않던 비싼 약값이 필요할 때면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 망설였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이때 약국을 하시던 사모님이 원가에도 미치지 않는 싼 값으로 6개월간이나 도움을 주셔서 완쾌될 수 있었다.

  그 이후 교수님은 주례를 해주셨고, 나는 가족을 데리고 매년 찾아뵙게 되면서 친척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찾아뵐 때면 당신이 쓰신 논문과 책을 주시면서 나에게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이 자극이 되어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항상 받기만 했던 내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드릴 때는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었다. 그러나 이것은 교수님의 가르침과 보살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박물관에서 생활했던 것을 참 잘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훌륭한 교수님은 물론 존경할 만한 선배님도 만났기 때문이다.

  1년 선배였던 하문식 선배는 후배들에게 항상 먼저 인사를 했고, 군복바지 한 가지만 입고 다니면서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성적도 가장 뛰어났다. 이러한 선배가 고려대학교 대학원 시험을 보러 갈 때 함께 가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시험을 친 후에는 회를 사주면서 격려를 해주었는데 이때의 회는 내가 생전 처음 먹어본 것이었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던 선배가 후배를 위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고, 지금 이 선배는 나와 같은 고인돌을 전공하면서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현재 수원 영덕고등학교의 교감 선생님으로 계시는 김명래 선생님께 자극을 받았다. 수원여자고등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 선생님은 항상 학습 자료를 연구하고 계셨는데 이것이 나의 학습 자료 제작에 관심을 갖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학습 자료를 만드는 데는 부천 상도고등학교의 목상태 선생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교육용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전국 대회에서 금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컴퓨터에 능했던 목선생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밖에 용인 백암고등학교의 김건선생님은 해박한 영어 실력으로 나를 도와주었으며, 학생에 대한 열성은 무엇보다도 본받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많은 분들은 나에게 항상 큰 자극제가 되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서른다섯 살에 주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초임지의 제자들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다. 86년도에 고3이었던 박경수 군이 생각난다. 박군은 홀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했었는데 가난한 가정을 책임져야 해서 수업이 끝나면 다른 학생들이 자율학습을 하는 시간에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웠다. 그래서 항상 피곤했던지 조회 시간에 늦는 경우가 많아 학교에서 가까이 있던 집에 달려가 깨워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술을 얼근하게 먹고 교실에서 기웃거리는 박군을 발견하고 운동장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이때 박군은 선생님이 박사가 되면 큰 카센타를 경영해서 자동차를 한 대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약속이 이행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만나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러한 박군이 졸업 후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온 것이다. 당시 서른다섯 이었던 나는 황당했지만 박군이 고등학교 시절 결혼식 주례는 꼭 내가 해줘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주례를 해 줄 마땅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지역의 면장이나 농협 조합장 보다는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내가 하는 것이 더 의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얼떨결에 사회 보러 오셨냐는 예식장 직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례를 했다. 지금은 보험설계사로 열심히 살아가는 박군의 모습을 볼 때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주례는 두 번 했는데 다른 한 번은 마흔 다섯 살 때였다. 수원여고 졸업생인 윤순영이다. 윤양이 수원 수일여중에서 대입수능고사를 보던 날,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교문에 있는데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시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숨도 못자서 정신이 몽롱한데 오늘 시험을 어떻게 하느냐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나는 윤양의 두 손을 꼭 잡으면서 내 손은 특별한 손이니 오늘 시험을 아주 잘 볼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효험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평소 모의고사보다 훨씬 잘 봐서 서울의 일류대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윤양이 어느 날 찾아와 거절할 수 없게 말을 해서 결국 주례를 하기로 했으나 결혼식 당일에 늦어버렸다. 같은 날 서울에서 있었던 조카의 결혼식으로 잠깐 들렀다가 오는 길이 너무 막혀 예식 시간에 도저히 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동차를 아내에게 맡기고 지하철로 갈아타고 왔으나 시작 시간에 15분이나 늦었다. 허겁지겁 주례를 하는데 앞에 서 있는 신부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수원 월드컵경기장 컨베이션센터에서 식을 했는데 수원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진땀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체험을 했다. 다행히 결혼식이 오후 3시로 마지막 순서여서 식의 진행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앉아있는 식장을 가로질러 들어갈 때의 민망함을 지금도 생각하면 뒷머리가 아플 정도이다.


가족 사항은?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큰 딸과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장남, 그리고 일곱 살이 된 막둥이가 있다. 나는 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느라 11시 경에 주로 귀가했다가 7시 정도에 출근을 하는 생활이 반복되어 집안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른다.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잘 커주는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묵묵히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있는 아내에게 항상 고맙다. 아내도 교사이지만 다행히(?) 실업과목을 담당하고 있어서 나보다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번에 큰 놈이 대학에 합격을 했는데 가르치던 제자들이 합격을 했을 때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 내 자신을 보면서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재 막둥이는 7살인데 늦둥이를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느끼지 못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난리인데 늦둥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낳을 능력만 있으면 낳으라는 권장을 꼭 하고 싶다. 가족이 화목해지는 지름길이고, 젊어지는 비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원시문화상과 경기도문화상을 연속해서 수상하게 된 이유는?

  2005년에는 수원과 인근 지역의 선사유적에 대한 연구 공로가 인정되어 수원시문화상(학술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때 교수 2명과 경합을 했는데 내가 수상하게 되었다는 뒷얘기를 듣고 교사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2006년에는 경기도에서 수여하는 경기도문화상(인문사회과학분야)을 수상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인문사회과학분야의 학자 중에 뽑혀서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에 흥분되기도 했었다. 사실 이 상은 큰 상이기 때문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 만큼 수상 소식은 나를 더욱 들뜨게 했다. 이 상을 받게 된 이유는 경기도 지역의 고인돌을 총 망라한 단행본을 낸 것이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잘 믿어지지 않는 큰 상을 받은 것은 대학교 때 박물관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를 할 때의 교수님 말씀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박물관에 있었던 나는 다른 선배들과 함께 11시 이전에는 박물관을 나서지 않았다. 유물 정리와 각자의 공부 때문이었다. 이 날도 교수님과 11시쯤에 연구실을 나서는데 다른 교수들의 연구실에 모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시고는 ‘우리나라 교수들은 참 연구를 게을리 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때의 말씀을 지금도 마음에 새기며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술을 많이 먹지 못하는 타고난 체질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아까운 성격도 상을 타게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2006년에 출간한 책을 소개하면?

  사실은 2006년에 발간한 것은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의 책은 화성문화원의 요청에 의해서 2004년에 비매품으로 출판된 『화성의 선사문화』였다. 이 책은 논문 두 편과 선사시대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들을 기술한 것이었다.

  두 번째 책이 작년에 출판된 『경기지역의 고인돌 연구』이다. 이 책은 512쪽으로 분량이 방대하다. 경기도 지역에 발령을 받은 후 23년 간 방학과 주말을 이용해서 조사하고 분석한 고인돌을 총 망라한 것이다. 일반사람들이 접하기에는 내용이 방대하고 전문적이어서 어려움이 있으나 고고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나 일반인, 대학생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기도 지역의 고인돌을 총 정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며 아직은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는다.

  책을 낸 후 가끔 책을 사본 독자들과 통화할 기회가 생기는데, 그 때 저자와 통화를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이럴 때면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한다.


고인돌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 때 운 좋게 고고학을 전공하시는 분이 우리과에 계셨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이융조 교수님과의 인연에서 시작된 것이다. 81년부터 청원 두루봉동굴이나 단양 수양개 구석기시대 유적을 주로 발굴을 했으나 고인돌은 83년에 황석리고인돌 유적 발굴이 처음이었다. 나에게 고인돌을 전공하라는 계시가 있었는지 이 때 담당했던 고인돌에서 사람뼈가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었다. 이 고인돌의 발굴을 계기로 대학교의 졸업 논문 주제를 고인돌로 하게 되었고, 그 이후 고인돌과의 인연이 계속되게 된 것이다.

  경기지역의 고인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84년 영북종합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으면서 부터이다. 규모도 크고 잘 생긴 탁자식 고인돌이 분포한 포천에 발령을 받은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교직에 들어서면 대개 대학에서 전공했던 것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나에게는 오히려 포천지역의 고인돌과의 만남이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그래서 87년에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 하던 중 경기대학교 최홍규 교수의 강력한 권유로 2001년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0여 년간 경기지역(인천, 서울 포함)에서 보고 느끼고 연구한 고인돌을 집대성하여 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나는 고인돌을 만나면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하는 희열을 맛본다. 그래서 피곤한 몸을 뒤로하고 주말에 사진을 찍으러 산속을 헤맬 수 있었던 것이다. 오산 외삼미동고인돌, 포천 금현리고인돌, 용인 주북리고인돌, 이천 남정리고인돌, 연천 진상리고인돌, 안성 만정리고인돌 등은 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했던 전북 고창 도산리고인돌과 경남 창녕 유리고인돌은 나를 고인돌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위대한 유산들이다.


현재 하고 있는 활동은 무엇이며 앞으로의 계획은?

  현재의 학술활동으로는 수원문화사연구회와 화성시역사연구회의 연구위원, 고인돌사랑회의 자문위원, 백산학회, 한국고대학회, 경기사학회, 충북사학회의 회원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교육단체인 경기교육포럼의 회원과 경기도사회과연구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사에게 계획이라는 것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잘 되도록 지도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대학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하기도 하지만 가는 것 자체도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대학에서 7년 정도 야간 강의도 해보았지만 고등학교의 수업만큼 인간적인 재미는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세 번째 책을 내년까지 내고 싶다. 경기도 지역의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를 망라한 선사시대 유적을 중·고등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으로 엮어 내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자 목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숙지고등학교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2007년 경기교육 봄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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