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기록

안성3ㆍ1운동기념관

고인돌인 2011. 9. 20. 12:52

퇴근길에 안성3ㆍ1운동기념관을 들렀다.

큰 마을을 끼고 있지 않아서 들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희생하신 선열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작지만 깨끗하고 해설사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어 편안했던 기념관>

 <기념탑>

 <무궁화동산>

 <사당>

 <태극기 광장>

 

 

다음은  안성3ㆍ1운동기념관의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http://41.anseong.go.kr/summary/sub01.php

 

<1919년 3월 11일>
최초의 시위 - 서울에서 3ㆍ1운동이 발발한지 열흘 후인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에서 보성전문학교 학생인 고원근이 주도하여 조회시간에 학생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다.

<1919년 3월 25일 >
원곡면 시위 - 양성학생들의 만세운동은 이내 원곡면에서의 시위운동으로 이어졌고, 3월 28일부터는 가까운 동리와 칠곡리 등에 연락하여 외가천리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4월 1일>
양성면 시위 - 양성면 지역에서는 동리단위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덕봉리에서는 4월 1일 밤 약 200명이 동리산 위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산정리에서는 저녁 행길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 산발적인 만세시위가 행해졌다.

<1919년 4월 1일 >
원곡ㆍ양성 연합시위 - 원곡면과 양성면에서의 산발적인 시위는 연합시위로 번졌고 밤 8시 양성면, 원곡면 시위대는 만세고개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를 불태웠다. 또한 우편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고 서류, 집기, 일장기를 불태우며 이 지역을 이틀간 해방시켰다.

 


이곳 안성지방의 3.1독립 만세운동의 배경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29인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만세삼창으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갖게 되어 이를 기점으로 교통이 편리한 철도, 연변의 대도시에서 중소도시와 읍·면지역으로 파급되었으며, 항쟁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항쟁일자를 장날로 택한 경우가 많았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전국 211개 지역에서 1,542회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참가인원은 2백만명이었다고 기록되었는데
1910년 한국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식민지 통치책인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시, 한국민을 영원히 자기들의 지배하에 두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탄압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직제에 경무총감부를 설치, 조선주차일본군헌병군사령관을 경무 총감에 임명하여 헌병과 경찰의 2중 구조속에 우리 민족으로 보아서는 4대 악법인 『범죄즉결례』 『경찰범처벌규칙 』『태형령 』『민사쟁송조정령 』을 바탕으로 지배통치를 강화시켰으며, 아울러 토지조사사업을 1910년 3월부터 1918년 11월까지 실시하여 우리 농민들이 경작하고 있던 토지를 빼앗아 우리 농촌이 빈곤·무지와 유민의 장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 』을 공포하여 우리 민족을 일본 천황에 충성을 다하는 신민으로 양성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폭압공포통치 아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1919년 세계정세 변화 속에 나타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재일본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운동에서 영향을 받고 고종의 사망에 따른 민족적 감정이 복합되어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의 3.1운동으로 분출되었다. 이 운동은 민족대표 33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 직업의 차별, 도시와 농촌의 구별을 불문하고 일치단결하여 한국인이 살고 있는 곳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안성지방의 3.1만세운동 현황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양성군, 죽산군의 3개군을 하나로 묶어 안성군으로 만든 지역으로서 3월부터 4월까지 안성의 곳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읍내(안성1,2,3동)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1일 읍내에서 50명이 모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이후 계속되어 3월 28일 읍내면 동리 거주 날품팔이를 하는 서순옥(徐順玉)이 동네사람 20여명과 함께 산에 올라 조선독립만세를 불렀으며 4월 1일에는 더 많은 동네사람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동리, 서리, 장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3월 29일에는 읍내 장기리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진공필(陣公弼)이 수십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서 3월 3O일 읍내에서의 만세운동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이날 500~600명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 31일에도 3,000명의 만세군중이 군청과 면사무소를 응징하고 등불행진을 하였으며, 다음날 4월 1일에도 50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중 일본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체포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죽면(죽산면)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1일 죽산공립보통학교 양재욱과 안재헌 등은 이 학교 학생 5O여명과 함께 학교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두현리 주민 수백명과 더불어 죽산리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몰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이죽면 두현리 거주농민 이기훈, 이용식과 장계리 거주 농민 최창달은 두현리에서 도로 보수하고 있던 인부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권유하고 같은 마을의 윤상구, 조원경과 함께 동네사람 수백명을 모아 죽산리 만세운동에 참석했던 것이다. 4월 2일 밤 전날에 이어 죽산시장에서는 2,O00여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죽산경찰관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죽면 장원리 농민 유춘삼, 이강칠, 박광순 등은 동네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고하여 죽산리 만세운동에 참여시켰으며, 같은 마을 이수혁, 이영근도 동참하여 만세대열에 합세했다. 한편 이죽면 장계리 농민 최창혁과 죽산리 김용규는 죽산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을 죽산시장 싸전 앞에 모아놓고 만세를 부르라고 권고하였으며, 죽산리 농민 윤규희는 집에서 만든 태극기 3개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기도하였다. 이죽면 매산리 거주농민 조문삼, 김기은, 이주남, 이원선 등도 매산리 주민들을 이끌고 죽산시장 만세에 참가하였다. 일제는 비폭력 만세행진을 하는 군중에게 무자비하게 발포를 하여 사망 3명, 부상 8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죽면민의 만세운동은 다음날인 4월 3일에도 계속되어 500명이 죽산에 모여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병의 발포로 2명 사망, 5명의 부상자를 내기도 했다.

일죽면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2일 밤 주천에서 200명의 주민이 격렬한 만세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금산리 일죽면사무소와 주천리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벌이고 주재소의 유리창을 돌과 기와조각 등을 던져 깨뜨리기도 하였다.

삼죽면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3일 오전 5시 주민 약300여명이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만세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수비대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여 사망2명, 부상5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양성, 원곡의 독립만세 항쟁 2일간의 해방을 위한 독립만세 운동은 양성면에서 먼저 일어났다.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학생들이 일제히 학교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3.1운동편 기3, 1977, 4 이어 4월 1일 양성면에서는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날의 만세운동은 면의 각 마을이 따로따로 마을에서 만세 운동를 하다가 면소재지인 동항리로 집결하여 약1,000여명의 주민이 면사무소,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에 참가한 마을을 보면 덕봉리(德峰里), 산정리(山井里), 도곡리(挑谷里)등이었다.
원곡면의 만세운동은 4월 1일 1,000여명의 주민이 조직적으로 행동했음이 양성과는 달랐다. 원곡의 각 동리 연합만세운동을 추진함에 있어 리더인물들이 활동했음이 재판과정을 통하여 밝혀졌는데 이들에 의하면 각 동리마다 만세운동원을 조직하고 저녁 8시경 등불 또는 횃불을 밝혀 들고 면소재지인 내가천리 면사무소로 모이게 했다. 여기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일행 중 이유석이 “이제부터 면장을 끌어내어 국기를 쥐어 선두에 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주재소로 가자”는 제안에 따라 면장 남길우와 면서기 정종두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양성면으로 향했다. 이들은 양성면과 경계인 성은고개(현재 안성3.1운동기념관)에 이르러 이유석, 홍창섭, 이덕순 등의 연설을 듣고 각기 몽둥이와 작은 돌들을 들고 양성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이 있는 양성면소재인 동항리로 나아갔다. 이때 양성면 주민은 만세운동을 하고 저녁 9시 5O분경 해산하여 각기 돌아가려던 중 원곡주민들을 만나 합류하여 2,000명으로 불어나자 다시 주재소로 가 만세운동을 한 다음 주재소를 불태우고 이어서 우편소와 면사무소의 집기와 물품, 서류 등을 부수고 불태웠다. 이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상과 대금업자의 집을 공격하여 가옥을 부수고 가구류와 기물들을 불태웠다. 양성면에서 관공서와 일인 상점을 응징한 주민들은 이튿날인 4월 2일 새벽 다시 성은고개를 넘어 원곡면 외가천리에 있는 원곡면사무소를 공격하여 불태우고 일본인들을 완전 몰아냄으로서 비로소 2일간의 새밝골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날 아침 아침식사를 한 후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부수어 통치행위에 막대한 피해를 주려고 하였으나 일본수비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피신/해산하였다 2일간의 실력항쟁으로 해방을 맞은 양성, 원곡면은 일제 당국에게 경악과 곤혹스러움을 안겨주었으며 헌병경찰 정치에 의하여 순종할 줄 알았던 우리 민족이 일시에 전국적으로 만세시위를 격화시켜 일본은 항쟁 진압을 위하여 군대동원을 지시하고 경기도에서 가장 극렬하게 운동을 전개한 수원과 안성에 4파(派)로 나누어 검거반을 파견했다. 헌병장교를 지휘관으로 한 이들 검거반은 현지에서 주로 야간에 검거를 실시, 약800명을 검거하고 19명의 사상자를 내고 17개소에서 총276호의 가옥을 방화했다. 원곡/양성 지역에서 4월3일 조선주차군 제2O사단 보병 제4O여단 제79여대 소속 장교 이하 25명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하여 투입/검거하는 와중에 피살1명, 부상2O여명, 가옥 9채가 소실되었다. 시위참여자 대부분은 일본군의 검속을 피하여 피신상태이어서 야간수색 등 갖은 방법으로 검거 하려고 하였으나 부진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경찰은 원곡면장을 시켜서 농사철임을 감안하여 경찰서장의 연설을 듣고 나면 사면해서 농사를 짓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16세 이상 60세까지 남자들을 4월19일 현재의 원곡초등학교 뒷산에 모이도록 가족, 친지들로 하여금 피신자들을 설득하였다. 당일 지정장소에 모이자 헌병대는 몽둥이로 무조건 폭행을 가하고 저항 또는 도망자는 발포하여 총살시키고 양민들은 상투를 묶어서 안성경찰서까지 3O여리 길을 걸어서 연행하였다. 다시 일본군은 6월 1일 세 번째로 36명의 군병력을 동원하여 경찰관들과 함께 검색을 실시했다. 양성의 경우는 양성보통학교 교정에 검거반이 야영을 하면서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을 체포하여 아카시아나무 몽둥이로 구타했다. 이러한 짓을 한달 이상 계속하여 맞아 죽은 사람도 생겼다. 이러한 가운데 주동인물 중 이희권, 이양섭 만이 체포되고 최은식, 이덕순, 이근수, 이유석, 홍창섭 등은 검거망을 피하였으나 최은식은 주민의 신고로 체포당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시위 중 파괴/소실된 일제 재산과 일부 피고의 소송비용까지 부담 시켜 정신적/육체적/물질적 고통을 모든 주민에게 안겨주는 야비한 정책으로 보복을 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안성군 원곡/양성면의 항일독립만세항쟁으로 2일간의 해방을 이루었던 선열들의 업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성격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전 주민의 격렬한 항일운동 전개였다. 양면을 합하여 총 세대수가 1,200여 호에 불과한 지역에서 2,000여명의 주민이 만세항쟁에 참여했다는 것은 전 주민이 항일만세 운동에 나서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주민 전체가 힘을 모은 것은 일반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영도력 이나 공동이익을 위한 협동심의 발로라던가 아니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힌 요소를 해결 하기 위해서일 때 단합된 힘을 보이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양성/원곡면민이 보여준 단 결된 모습은 어떤 군중심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민족 전체가 노예상태에 있었음을 피 부로 느끼고 이의 굴레를 벗고자 한 민족정신의 발로 속에 감행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항쟁의 리더자는 농민이었다. 농민의 항쟁 주요인물은 지식인이라기 보다는 항쟁 군중과 같은 신분 즉 농민들로서 환경과 여건이 같은 장점을 가졌다는 점이다. 양면 인구 중 80%가 농민계층이었다는 것과 대부분이 자작 겸 소작인으로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면서 더욱더 빈궁화가 진행되는 경제적 모순에 대한 저항도 항쟁을 격화시키는데 한몫을 했다고 본다. 원곡지역의 항쟁과정을 보면 즉흥적인 항쟁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사전에 준비과정을 거쳐 전개했음을 알 수 있다. 항쟁의 리더의 한사람인 이덕순이 아들 덕만의 혼사를 위해 2월 서울에 갔다가 광무황제의 독살설을 듣고 비분을 느껴 3일 머물렀다. 그후 그는 세차례에 걸쳐 서울을 상경하여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항쟁을 계획했다. 그후 피로연, 회갑연 등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과정을 거쳤으며 3월 25일과 26일경부터는 매일같이 만세항쟁을 지속하면서 전의를 북돋운 다음 4월 1일 밤을 기해 양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셋째, 실력행사에 의한 2일간의 해방이었다. 양성/원곡 4/1독립만세 항쟁은 비폭력 평화시위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실력행사에 의한 항일운동이었다.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비폭력화를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갖가지 전술과 전략이 필요한 관계상 일제와 대항하기 위해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도 필요악은 아닌 것이었다. 그리하여 양성/원곡독립만세 군중은 양성과 원곡의 일제 관공서를 공격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철폐하고 일본인을 몰아내어 2일간의 해방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감정에 치달은 결과이거나, 탄압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과 다르다. 질서 정연한 가운데 일제기관에 대한 폭력을 사용했지 일본인에 대한 폭력을 사용치 않았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넷째,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양성/원곡 4/1독립만세 운동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민족독립의 활화산이었다. 우리 민족의 적이 일본제국주의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독립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민족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투쟁했던 빛나는 역사를 장식하였다. 전국을 통하여 한 지역에서 항일항쟁 중 순국한 순서를 보면 평남 맹산 54명, 수원 제암리 29명, 평북 정주 27명, 평남 성천 25명, 원곡/양성의 24명으로 되어 있으나 옥고를 치른 숫자는 서울363명을 제외하고 127명으로 단연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지역 항쟁운동의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대중화, 농민중심의 격화단계였다. 원곡/양성만세 항쟁은 초기 도시, 지식인, 학생 등에 의한 발발 단계에서 대중화/농민 중심의 격화 단계로 넘어가던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민족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 당국이 무지하다고 생각한 농민계층이 주도하고 활동한 모범적인 원곡/양성의 만세항쟁에 대하여 가혹하리만큼 중죄를 언도한 것은 농민 세력에 대한 경종을 주어 독립운동에 대한 참여를 제어하려고 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