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기록

경기역사교육연구회 발표 및 영릉과 신륵사 답사

고인돌인 2011. 11. 26. 22:09

경기도역사교육연구회에서 영릉과 신륵사를 답사했다.

역사를 하는 분들끼리 답사를 하는 것이 더 의의가 있었던 것 같다.

먼저 찾은 곳은 영릉인데 영릉에는 세종대왕과 효종의 능이 있다. 세종의 능은 英陵, 효종의 능은 寧陵이었다.

세종대왕릉인 영릉은 사적 제195호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 國祖五禮儀〉 치장조(治葬條)를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石物)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문양과 12지신상만 조각해 조선병석문(朝鮮屛石紋)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광릉(光陵)에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12지신상을 표시했는데 이보다 1년 후에 천릉한 영릉에서는 12지(支)를 문자로 기록했고, 그 이후에는 난간에 24방위까지 넣은 새로운 왕릉상설제도를 이루었다.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神道碑)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녕릉(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녕릉(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초청 강사 신세계상업사박물관 배봉균 관장님>

 <추계 답사 직전>

 <세종대왕 상>

 <혼천의>

 <세종대왕님을 만나다>

 <영릉에서 내려오는 길의 전경>

 <영릉 예감>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daum 백과사전)

 <나옹화상 부도 앞 석등>

 <나옹화상 부도>

<신륵사 다층 전탑>

 <나옹화상의 참선 장소>

 

<답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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