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석장리 유적을 학생들과 답사했다.
금강변에 위치한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은 일제시대에 한반도에는 구석기유적이 없다는 식민사관을 깨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남한에서는 최초인 1964년 연세대학교박물관(손보기)에서 발굴을 시작한 이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등에서 발굴을 이어갔다.
공주 석장리 구석유적의 의의는
*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 유적이 없다는 주장을 뒤엎는 역할을 했으며
* 남한 최초로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있었음을 밝힌 유적이고
* 남한에서 최초로 1964년에 주먹도끼를 발굴하기도 하였다.(주먹도끼는 연천 전곡리유적(1978년 발견)에서 대량 발굴되어 아시아에도 주먹도끼문화가 발달했음을 증명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구석기유적인 석장리 유적을 보면서 1964년으로 시계를 되돌려보는 것은 어떨까요?
다음은 <다음 사전>에 소개된 공주 석장리 유적 내용이다.
사적 제334호. 유적 앞에는 동서방향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으며, 유적의 북쪽으로 높지 않은 산언덕지대가 자리잡고 있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구석기시대 문화층의 존재가 확인된 곳으로 1964~74년 10차례에 걸쳐 연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했고, 1990년 봄에는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석장리유적의 퇴적두께는 약 8m이다.
구석기시대의 지층은 크게 3개의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구석기층에서는 찍개·주먹대패·긁개 등의 석기가 나왔다. 중기구석기로 넘어오면서 석기를 만드는 솜씨가 그 전(前) 시기보다 발전된 것으로 나타나며, 석기의 종류도 늘어난다. 찍개·주먹대패·자르개·긁개·찌르개·주먹도끼 등이 중기구석기문화층에서 나왔다. 후기구석기문화층에서는 석기제작터·집터·살림터가 드러났다. 이 문화층에서 나온 나무숯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분석한 결과 2만 830±1,888BP(집터), 3만 690±3,000 BP(집터 아래층)라는 연대가 나왔다.
꽃가루분석으로 후기구석기시대의 지층에서 오리나무·단풍나무·명아주과 등의 꽃가루를 찾았다. 집터에서는 사람 머리털이 여러 점 발굴되었고, 집터의 문 앞에 있는 불 땐 자리에서는 오리나무속의 나무숯이 나왔다. 집터의 크기로 보아 10명 안팎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돌을 조금 다듬어 거북·새·개와 같은 짐승상을 나타낸 돌조각품을 비롯하여 고래상을 새긴 흔적이 집터 바닥에서 드러났다. 석장리 후기구석기문화층의 석기로는 돌날·돌날몸돌·밀개·새기개·주먹도끼·긁개·찌르개 등이 있다. 이 문화층의 특징은 석기의 크기가 작아지고, 그 종류가 많아지며, 수정이나 흑요석과 같이 새로운 재질의 암석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석장리 유적의 가장 위층은 중석기시대에 속한다. 흑요석이나 반암으로 만든 작은 돌날격지와 돌날몸돌 등이 중석기시대 문화층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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