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가족, 직장

친구에게

고인돌인 2009. 12. 29. 16:39

 
친구에게
오늘 수업을 하다가 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요즘 교실에서 학생들의 mp3나 pmp가 사라지는 일이 가끔 있거든. 오래 전 내가 너의 물건에 손댔던 것을 지금까지 후회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초등학교를 달리 나온 우리는 충북 괴산의 한 면 소재지에서 중학교 때 처음 만났지. 2학년 때 내 짝꿍이었던 너는 매우 활발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너는 알지 못하겠지만, 아니 하늘나라에 있으니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너의 돈을 훔친 일이 있었단다.
벌써 30년 이상 흘렀지만 그때의 일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어.
학교가 파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을 때였지.
나도 집에 가려고 기지개를 켜는 데 옆 책상 속, 바로 네 책상 속에 돈이 보이는 거였어. 나는 그만 그 돈을 내 주머니에 넣고 말았지. 글쎄, 그때는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돈을 훔쳤다는 사실이야.
이튿날 네가 돈이 없어졌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우리 반 모두는 책상 위에 올라가서 벌을 받게 되었어. 돈을 훔친 사람은 솔직히 자수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지. 그렇지만 나는 자수할 용기가 나지 않아 잠자코 있었단다. 공연히 다른 친구만 의심을 받았었지. 그 친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많이 남아 있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너는 많은 가난한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지. 나 역시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집안에서 4남 3녀 중 여섯 째인 나만은 가르쳐야 한다고 해서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진학하게 되었지. 물론 등록금이 싼 사범대로 말이야.
대학교에 가고 나서야 나는 그때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꼭 해야겠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지. 비록 사이다 한 병 값 정도의 돈이었지만 나의 마음속에는 항상 너에 대한 미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어. 그런데 너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 대학 재학 때에도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너를 만나지 못했지. 1984년 교직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정신없이 지냈던 나는 중학교 동창회가 활성화되었던 40대가 되어서야 너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어.
너의 초등학교 동창들을 중심으로 너의 안부를 물어보았는데 아는 아이들이 없어서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 그러다가 어느 친구로부터 서울에서 네 얼굴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런데 그 다음에 들은 소식은 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어. 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 너와 만나서 소주라도 기울이면서 철없던 그때 내가 너의 돈을 가져간 일이 있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나의 죄를 내려놓고 싶었거든. 그런데 사과를 받아야 할 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어. 사과해야 할 상대가 세상을 떠났다니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이니.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너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고, 종종 고등학교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후회할 일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곤 해. 그래서 오늘도 학생들에게 나의 부끄러운 추억을 이야기를 했던 거야. 내 제자들은 나처럼 후회스러운 그리고 영원히 사과하지 못할 일을 하지 않도록 말이야. 그 얘기 앞으로도 학생들에게 계속해도 되지?
친구야! 하늘나라에서는 잘 있니? 그때 내가 너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이제는 용서해줄 수 있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너에 대한 미안함을 마음에 안고 살았단다.
30년 이상이 흘렀지만 아직도 너의 모습은 내 가슴속에 깊이 남아 있어. 어쩌면 내가 너의 돈을 훔쳤던 일 때문에 너를 그만큼 더 오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몰라. 사이다 한 병 값으로 너를 기억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그래도 너에게는 밑지는 장사는 아니잖니?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나게 되면 웃으면서 오래 전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눠보자. 손을 꼭 잡고서 말이야.

우장문 (경기도 수원시)

출처 리더스다이제스트 우리사는 이야기(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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